귀족이 되어야겠습니다. 뭐부터 하면 되죠?

던로빈 성에서 신분상승을 계획하다

by 마봉

8월 15일, 여행 33일째. 던로빈 성(Dunrobin Castle) 방문

레일패스 집에 두고 기차역 가는 바람에 못 갔던(대신 엘긴에 갔다) 던로빈 성으로 향했다! 던로빈 성에 가려고 한 것은 내가 특별히 성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철도 웬만한 구간은 다 타 보고 싶은데, 동쪽 해안(애버딘, 던디 등)이랑 에딘버러/글라스고 아래쪽은 재미없을 것 같고, 나머지 노선은 얼추 다 타봤는데 인버네스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노선은 안 타봄. 기차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북쪽으로 올라가 보고 싶었다.

철도 노선 보다 보니 '던로빈 성' 괄호 열고 '5월에서 10월까지만 시즌 한정 운행' 괄호 닫고. 북쪽? 성? 여름 한정? 당연히 가야지! 하고 당장 리스트에 넣었다.


이곳은 역 운영이 여름 한정일뿐만 아니라 내리는 사람이 있을 때만 서는 간이역(Request Stop)이기도 했다. 즉 온라인 발매로 던로빈 성까지 끊은 사람이 있거나 혹은 승무원한테 "저... 여기 내려요(발그레)..." 하고 말해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간다는 뜻이다.


인버네스에서 스코틀랜드 본토 최북단인 윅(Wick)과 서소(Thurso)까지 이어지는 파 노스 라인(Far North Line)에 있는 이 간이역은 원래 성의 주인인 서덜랜드 공작이 성에 오는 가족들이나 손님들 편하게 성에 오시라고 만든 역이었다. 역에서 성까지는 걸어서 5분밖에 안 걸리니 완전 기차역 하나를 개인용으로 쓴 것이다(개 부러움).

여름 한정! 간이역! 던로빈 캐슬 역(역사 건물이 너무 귀욥다!)

던로빈 성 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여름이니까 방문객이 많이 있겠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성 앞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들이 서너 대 서 있었고 성 안에는 단체 관광 온 스페인 아줌마 아저씨들로 가득했다.


던로빈 성은 이제까지 본 스코틀랜드와 성들과는 매우 스타일이 달랐다. 스코틀랜드의 고성들은 전쟁과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진 거칠고 투박한(벽 두껍고 창문 작고 등등) 성이 대부분인데, 던로빈 성은 프랑스의 샤토(Château) 느낌이 나는 성이었다. 이것은 19세기 중반에 서덜랜드 공작이 성을 현대적이고 화려하게 대대적으로 개축했기 때문이다. 당시 개축을 맡은 사람은 찰스 배리(Charles Barry)라는 당시 탑티어 건축가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찰스 배리는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과 스코틀랜드 전통 양식을 결합해서 성을 리모델링했는데 그래서 이 성은 다른 스코틀랜드 성과 달리 뾰족한 첨탑(Spire)들이 특징이다. 그는 정원도 한 딱가리 하게 화려하게 만들어 놨는데 얘는 또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설계한 르 노트르의 스타일을 본따서 만든 거였다. 기하학적이고 깔끔한 정원과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르는 대 저택의 모습은 스코틀랜드의 경관 속에서 매우 이질적이고 이국적으로 보였다. 아... 멋지긴 한데 이건 스코틀랜드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쓰...?

각 잡고 만든 던로빈 성의 프랑스식 정원
정원의 다른 쪽 - 바다에 면해 있어 경관이 처 아름답다

나, 방 하나만...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관리하는 라임 파크와는 달리, 던로빈 성은 소유주가 항상 서덜랜드 공작 집안이었기 때문에 성의 역사가 확실했다. 지금도 이 성의 소유주는 25대 서덜랜드 백작인 알리스테어 서덜랜드(Alistair Charles St. Clair Sutherland, 25th Earl of Sutherland)이다. 왜 공작이었다 백작이었다 하는가 하면 - 1963년까지는 공작 가문이었지만, 상속법 때문에 현재는 다시 백작 가문이 되었다(다른 글에서 다룰 예정). 세대를 걸친 공작과 공작부인 그리고 아이들의 초상화가 복도를 따라 계속해서 걸려 있었고 만약 저 초상화가 실물에 가깝다면 꽤 미모가 괜찮은 집안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초상화는 뭐 글타 치고 내가 이 성을 구경하면서 좋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름다운 방들 때문이었다.


기능별로 각각 따로 있는 방들 - 조식방, 석식방, 숙녀들 시간 보내는 방(레이디스 시팅룸), 서재, 음악실, 미술실, 몸단장하는 방(우아한 욕실과 붙어 있으며, 그날 입을 옷은 전날 저녁에 시종이 미리 가져다 놓는다), 낮 어린이방, 밤 어린이방, 유모 방... 여하튼 성이 무지 크다 보니 방도 엄청 많고(189개) 얼마나 정성 들여 꾸며 놓았는지 당장 짐 싸갖고 여기 들어와 살고 싶었다. 아 방 많은데 나 한 개만 주세요...

정원에서 성을 바라본 모습

차 마시는 시간이 영국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지만 각 방마다 각기 다른 디자인과 무늬들의 다기들이 놓여 있는데 하나같이 너무너무 예뻤다. 나는 사실 차도 좋아하고 티팟이나 컵도 좋아하는데 여기 있는 것들은 정말 다 환장하게 예뻤다. 침구도 고급지고 가구는 정말 저거 하나만 있으면 집에서 제인 오스틴 놀이하면서 글 쓸 수 있을 것 같은데...(당시에는 글도 쓰지 않았는데도 일단 하나 갖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흥미를 보이는 방은 그런 예쁜 방이 아니었다!!!


영국 하면 역시 귀신이지!

나는 포트리의 서점에서 우연히 '스코틀랜드의 귀신 나오는 집 이야기'라는 책을 발견하고 몇 페이지 넘겨보다(무서워서) 덮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 '몇 페이지'에 쓰여있던 내용이 바로 던로빈 성의 귀신 나오는 방 얘기였다. 어느 방인가 하면, 어린이방들을 지나 유모 방 바로 옆인 재봉사의 방(The Seamstress's Room)이었다.


방 앞에 붙어있는 안내판에 '이 방 또한(also) 귀신 나오는(Haunted) 방이다'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귀신 나오는 방이 이거 하나만은 아니라는 얘긴데, 나머지 하나는 어딘지 모르겠다. 내가 설명을 잘 안 읽고 지나온 방들 중 하나인 모양이다. 아무튼 이 방이 내가 책에서 읽은 바로 그 귀신 나오는 방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읽은 책 버전

00대 서덜랜드 백작의 딸이 천한 평민과 눈이 맞아 결혼하려고 해서 백작이 딸을 방에 가둠. 그랬더니 밧줄을 내려 도망가려고 함. 근데 밧줄 타고 내려가다가 백작한테 발각됨. 딸이 너무 놀라 밧줄 놓치고 떨어져 죽음 → 그다음부터 귀신 나옴


성의 안내문 버전

00대 서덜랜드 백작이 전쟁에 나갔다가 맥케이 가문의 여자를 포로로 잡아와서 가둠. 여자는 침대보랑 커튼 등등등을 막 연결해서 밧줄 만들어 타고 내려감. 백작한테 발각. 백작 빡쳐서 밧줄 칼로 끊어버림. 떨어져 죽음 → 그다음부터 귀신 나옴


이 방에서는 간간히 흐느끼는 소리나 원망하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린다고 한다. 귀신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소리만 난다는 설명이다. 흠, 소리로만 따지면 바닷가 강풍 불 때 우리 동네 바람소리가 짱인데(귀신 한 백 명 지나가야 그 정도 소리 난다)...


이 여자 귀신(소리만 나는) 말고도, 형체를 드러낸 귀신으로 목 없는 남자 귀신이 복도를 걸어가다 벽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목격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지는 모른다고 한다...!!!(누군지 알아서 뭐 하시게요... 천도재?)

스코틀랜드 성 건축 양식에 좀 더 가까운 던로빈 성의 동쪽 건물

성 내부는 촬영 금지라 성 내부 사진을 하나도 못 찍었지만, 그 방은 귀신이 안 나온대도 딱 봐도 무섭게 생긴 방이었다. 옷을 관리하고 수선하는 방이라, 토르소만 있는 마네킹 위에 각 잡히게 공작가 사람들의 고귀하신 옷들을 걸쳐 놨는데, 그런 게 열댓 개가 쭉 늘어서 있으니 날씨도 이렇게 맑고 주위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이상하게 으스스했다. 날이 화창하니 망정이지 흐리고 어두컴컴한 날 관광객도 없는데 나 혼자 와서 이 방을 봤다면...ㄷㄷㄷ 아마도 그 밧줄 타고 내려간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이랬다.

→ 스페인 관광객들 몇십 명이 다른 방 앞에는 몇 명 없는데 그 방 앞에만 와글와글 서있음.

"올라 바르셀로나 마르가리따 에스빠뇰라 베싸메 무쵸! #%^#$%#^ㅕ%^&*(^"

→ 귀신이 진짜 있었어도 시끄러워서 도망갔을 상황

그러니까 이 중 어느 방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겁니까 귀신상?
던로빈 성의 정원 크으 기가맥힘. 동영상 출처: 내가 찍은거임

매사냥 시범 쇼(Falconry)

하이랜드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된 기분으로 정원을 걸어 다니다 보니 한쪽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있었다. 아아닛? 정원에도 귀신이? 하면서 달려가 봤는데 귀신이 아니라 던로빈 성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매사냥 시연이었다.

횃대 위에 얌전히 올라가 앉아 있는 매(Falcon)
벤치에 앉아 자기도 뭔가 관람하려고 하는 수리부엉이(European Eagle Owl)

2000년에 오크니 제도의 호이(Hoy) 섬에서 트레킹을 할 때, 골짜기에서 커다란 새가 엄청난 속도로 내 머리 1미터 위를 쏜살같이 스치고 날아갔었다. 같이 걷던 애가 매다 매! 야 너 먹이인 줄 알고 채갈라고 했나 봐! 라고 했는데, 설마 지가 아무리 맹금류여도 나를 들어 올릴 재주는 없겠지만 순간적으로 소름이 촥 끼치긴 했다.


그때 나는 너무 걷기가 힘들어서 점점 속도가 늦어지고 있었는데 그 매를 본 순간 아 여기서 죽으면 나 쟤 밥 되겠구나...라는 자각이 퍼뜩 들어 존내 열심히 걸어 골짜기를 통과했다.


날것 그대로인 자연 속에서 인간은... 생각보다 먹이 사슬 아래쪽에 있다.

데이지꽃을 배경으로 존내 멋지게 서 있는 던로빈 성(아직 방 한 칸만 줍쇼 시전 중)

던로빈 성의 매사냥 시연은 단순히 새가 날아다니는 걸 보는 수준을 넘어서, 중세부터 내려온 전통 사냥 기술을 현대적인 유머와 함께 보여주는 종합 예술에 가깝다. 보통 하루에 두 번(오전 11시 30분, 오후 2시/2시 30분), 성 앞의 드넓은 잔디밭에서 약 30분 동안 진행되는데, 주요 시연 프로그램은 이렇다.


1. 근접 비행 (Low-level Flying)

시연의 하이라이트. 매나 수리부엉이가 관객들의 머리 위를 스칠 듯이 아주 낮고 가깝게 날아가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깃털이 스치는 바람 소리를 직접 느낄 수 있어서 사람들이 꺅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이거 실제로 보면 진짜 전율이 느껴진다. 매가 달리 매가 아님).


2. 루어 훈련 (Lure Work)

조련사가 줄 끝에 가짜 먹잇감(Lure)을 달고 공중에서 빠르게 돌리면, 매가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순식간에 급강하해 낚아채는 모습을 보여준다. 급강하할 때 매가 얼마나 빠른지 매의 궤적도 겨우 보일 정도다(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매가 공중에서 얼마나 날카롭게 방향을 틀고,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하는지 그 속도감을 체감할 수 있다.


3. 새들의 사냥 방식 교육

조련사 아저씨인 앤디 배닝(Andy Banning)이 마이크를 잡고 각 새들의 특징을 아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 영어라 아무리 아저씨가 말을 잘한들 100% 실감 나지는 않지만 외국인들이 많은 것을 감안해서 상당히 또박또박 천천히 설명했다. 아무리 조련해도 날아서 텨버리면 그만인 새가 뭐 좋다고 사람 말 들으면서 사는가 → 그만한 메리트를 주기 때문이다, 사냥 안 해도 좋은 먹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고 등등등. 그리고 맹금류라 성격이 까칠하고 개성적인 새 종류별로 달래서 데리고 사는 법(?), 그리고 각 새들의 특징을 설명해 준다.

매(Falcons): 엄청난 속도로 공중에서 사냥하는 법

수리부엉이(Owls): 밤에 소리 없이 접근해 쥐나 토끼를 잡는 '스텔스 비행'의 원리.

해리스 매(Harris Hawks): 특이하게 무리 지어 사냥하는 사회적인 새라는 점 등등.

사람들 사이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수리부엉이(어린애 옆인데도 안 위험하니까 저래 두는 듯)

귀족이 되려면 뭐부터 해야 하죠?

정말 훌륭한 성이군! 매우 마음에 든다.

그래서 이제 귀족이 되어야겠는데 뭐부터 하면 되죠?

아무래도 귀족 부모님을 구해야겠는데 이게 쉽지가 않을 것 같다.

한국에서조차도 우리 집안이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빼박 노비 집안일 것 같은데 영국에서 귀족이 되려면 하... 아무래도 다음 생을 노려 보던가 아니면 공작으로 환생하는 회빙환 웹소설이라도 쓰며 이 한을 달래던가 해야겠다.

간이역 지키는 노비 자리라도 줍쇼 굽신굽신
인버네스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며...(현타 10000%)
Spare a room for a poor soul, Your Lordship?
(나리, 불쌍한 영혼에게 방 한 칸만 적선해 주시겠습니까?)
인버네스 - 던로빈 성 (지도출처 Google Maps)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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