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고 말하기 위해 기차를 탔어
인버네스 역에서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카일 오브 로칼쉬(Kyle of Lochalsh), 스카이 섬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묵은 카일라킨의 맞은편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인버네스와 카일 오브 로칼쉬를 잇는 카일 라인(Kyle Line)은 웨스트 하이랜드 라인과 더불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열차 노선 중 하나이다. 하이랜드 깊숙이 들어가며, 호수, 산, 습지까지 다 나오는 하이랜드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노선이다.
카일 오브 로칼쉬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작정 거기 가본 것은, 이제 인버네스를 떠나면 하이랜드에 올 일이 없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스카이 섬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인버네스에서 카일 오브 로칼쉬까지는 약 2시간 반. 속도가 빠른 노선도 아니고 사람이 많이 타는 노선도 아니었다. 중간 정차역도 많고 일부 구간은 단선이라 기차 교행 대기(마주 오는 기차가 비켜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 시간까지 있어 더 느렸다. 한 마디로 시골 열차다.
기차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편하고 한가하게 열차 내 사진도 찍고 창 밖 풍경도 감상했다. 검색해 보니 카일 오브 로칼쉬 갈 때는 오른쪽에 앉는 게 좋고 올 땐 반대로 왼쪽에 앉아야 절경 감상하기 좋다고 했다. 사람이 많으면 원하는데 못 앉을까 봐 걱정했는데 텅 비어 있으니 뭐 왼쪽 오른쪽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 찍고 놀았다.
그레이트 글렌 웨이를 걸어 동쪽으로 넘어가는 동안 부드럽고 평평해지던 능선은 서쪽으로 향하면서 다시 거칠고 위압적으로 변했다. 아 그래 이거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보고 있었던 풍경들인데 다시 보니 갑자기 울컥했다. 그래, 이게 스코틀랜드지. 한국 돌아가려면 아직 보름 이상 남았는데도 이 풍경을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하이랜드에 살았나 보다.
카일 오브 로칼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여기가 얼마나 할 일이 없는 곳인가 하면, 기차에서 내리면 다시 기차에 타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약간 당황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다니는 P가 이런 것에 일일이 놀라면 안 된다. 할 일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 법.
스카이 섬의 입구인 카일라킨과 본토의 입구인 카일 오브 로칼쉬는 스카이 브리지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카일 오브 로칼쉬에서 보면 카일라킨과 그 너머 스카이 섬이 보인다.
카일라킨에서 1박 할 때도 아무것도 할 게 없었는데 그 맞은편에 있는 카일 오브 로칼쉬에도 아무것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지난번에 카일라킨에 머물 때 진흙탕에 빠지느라 결국 가지 못했던 마올 성의 폐허를 바다 건너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것으로 스카이 섬에 대한 작별인사를 했다. 언젠가 다시 올 수 있을까?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들어준다는데(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를 생각하면 신빙성은 매우 떨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간절히 원하니 언젠가 꼭 스카이 섬에 갈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역 근처 카페(오 다행이다 그래도 뭐라도 하나 있네!)에 가서 피시 앤 칩스로 점심을 먹고 동네 구경 좀 한 다음 한 시간 반 후에 출발하는 인버네스행 기차에 다시 올랐다. 인버네스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능선이 조금씩 낮아졌다. 울적하게 흐리던 하늘도 밝아지고 하이랜드의 색깔은 사라졌다. 하늘은 흐리고 우중충하고 산은 윤곽이 확실하고 들판에 서면 진창에 푹푹 빠지는 그 하이랜드는 이제 등 뒤로 다시 넘어갔다.
인버네스에도 작별을 고하기 위해 강가를 조금 걸었다. 딱히 할 건 없어도 적당히 있을 거 다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이즈의 도시, 강도 있고 산도 있고 바다도 가까운 곳. 다음번에 다시 올 날이 있겠지. 2000년에는 내가 16년 후에 다시 인버네스 올 줄 알았나 뭐.
저녁 먹으러 나가기도 귀찮아서 숙소에 앉아 컵스프와 B&B에서 나눠준 쇼트브레드로 때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도 30일이 넘어가니 떠돌이 생활도 꽤 익숙해진 것 같다. 아마도 전생에 나는 하이랜드에 사는 떠돌이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