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로빈 성의 올리버, 댓글 픽션
서덜랜드 공작의 가장 예쁜 딸과 평민 시인이 혼인서약을 맺던 날 던로빈 성과 정원은 더욱 우아하게 빛났다. 주인공들의 행복감과 축하의 물결이 빚어낸 색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언 맥도널드는 자신의 불행을 뼈저리게 느꼈다. 매 사냥터에서 벌어진 움직임을 알턱 없는 그는 두 사람의 결혼이 자기의 공(功)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 마이리의 희생으로 엘스패스가 쉬이 아버지 허락을 얻었건만, 두 사람은 어쩜 그리 모르는 체란 말인가? 괘씸한 것들.
얼마 지나지 않아 뤼미에르는 국가로부터 남작 지위를 얻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전쟁에서 무공을 세워서, 또 다른 이는 시(詩)로 꽃 피운 문화적 공로 때문이라고 했다. 서민들은 막강한 장인의 사위가 작위 얻은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세세한 절차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질투심 가득한 이언의 눈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로버트 번즈 급이라면 모를까 뤼미에르는 북쪽의 동네 시인 아닌가? 전쟁터에서는 이 맥도널드 가문의 사내가 훨씬 씩씩했고.
열심히 궁리하는 자에게는 문득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 온다. 우연히 이언의 친구가 던로빈 성에서 한 달 전 아서 마운디 그레고리를 봤노라고 했다. 1920년대 초반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는 공공연히 작위를 판매했는데, 아서는 작위 서훈을 알선하는 주인공이었다.
소박한 하이랜더들은 그런 법이 생긴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언 맥도널드는 그 법률 내용과 스코틀랜드 첫 수혜자 이름을 전파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남작 칭호에 5만 파운드라며. 두루뭉술 넘어가고 싶었던 공작은 이언을 던로빈 성으로 호출했고, 호된 꾸지람은 그동안 산(山) 사나이의 시샘이 쌓아놓은 다이너마이트 급 화약에 불을 지폈다.
이언은 부랑자들을 모아 뤼미에르의 가문, 마봉 클랜의 전멸을 시도했다. 맥마봉(Mac Mabon)은 전쟁을 치러보지 않은 소규모 클랜이라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성에서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엘스패스 커플은 처음에 괜찮은 듯싶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언의 암살 위협은 거세어 갔다.
뤼미에르는 조금이라도 남은 맥마봉 가문 사람들을 위해, 또 갓 잉태한 아이의 안전을 위해 스코틀랜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종착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터였다. 남작 커플은 던로빈 성에서 사라졌고, 세월이 가며 점점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부귀영화의 소란함이 싫어진 서덜랜드 가문은 우유 짜는 집을 개축한 소저택으로 옮겨 살며, 사회 환원 차원에서 던로빈 성의 많은 방들을 개방했다.
21세기에 이르러 현재 주인 알리스테어 백작이 뤼미에르 맥마봉 남작의 후손을 찾으려고 결심하는 계기가 생겼다. 스코틀랜드 아이오나 섬 수도원에서 엘스패스의 일기장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임신한 몸으로 목숨의 위협을 성경 읽기와 기도로 달래며 근근이 버티던 때의 기록이었다. 절망으로 스러지려는 마지막 날 그녀는 성 콜롬바의 환상을 보았다.
“동방에서 너희 후손은 너희가 못다 노래한 시(詩)를 읊으리라. 예술 혼을 꽃피워 걸작을 낳으리라.”
성인(聖人)의 앞날에 대한 계시와 축복은 부부가 필사의 도주(逃走)에 성공하며 먼 길을 떠나는 힘이 되었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맥도널드 가문은 과거 이언의 잘못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알리스테어 백작에게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SNS를 실시간 모니터링하며 뤼미에르-엘스패스의 후손 찾는 일에 앞장섰다.
2026년 4월 19일 한 보고가 접수되었다. 브런치의 대댓글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며.
“전 사실 Mac Mabon clan (맥마봉 클랜) 사람입니다.”
“저희 타탄 무늬도 나중에 공개할게요.” *
수석비서가 백작에게 이 문장을 알려드릴 때는 시간을 두고 그 사람의 계정을 더 살펴보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알리스테어 백작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Spare a room for a poor soul, Your Lordship?
(나리, 불쌍한 영혼에게 방 한 칸만 적선해 주시겠습니까?)
“알리스테어 백작은 이 대목을 읽고 눈물을 펑펑 흘리셨습니다. 던로빈 성의 방 한 칸을 구(求)하는 대목이, 자신의 신분을 모르고 빵 한 조각을 청하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어쩜 그리 비슷하냐며….”
Please, Sir, I want some more! **
(부탁드려요, 선생님. 조금만 더 주세요.)
사실은 귀족 혈통인 올리버가 고아원에서 제비 뽑혔던 장면이 떠올랐나 보다. 너무도 적은 죽 그릇을 들고 대표로 앞에 나가 배고픔을 하소연하는.
“우리는 99% 작가님이 뤼미에르 남작의 4대 손(孫) 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백작님과 그의 작위 계승자 영애님을 만날 거고요. 마지막 절차 한 가지만 마치시면.”
던컨이 풀어낸 사연은 그럴듯해도 납득 안 되는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말릴 수 없는 호기심이 반박 설명보다 질문을 부추겼다.
“그 절차라는 것은?”
“유전자 검사입니다.”
아. 잠시 이장님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떤 자존심이랄까.
망설임 속에 불현듯 저 위의 다이애나 비(妃)가 떠올랐다.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로열패밀리의 첫걸음은 쪽팔리는 검사와 함께 시작되는 거야. 나에 비하면 일도 아니지. 까짓 머리털 몇 오라기쯤이야.”
그렇지. 사람들은 그녀가 쪽팔림의 끝판 왕 검사를 치렀을 거라고 했지.*** 격려하는 듯 찡긋 윙크하는 모습까지 스치니 용기가 백배 충전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만 우렁차게 외치고 말았다.
“그럼요. 머리카락 다섯 올 뽑아 드리지요. 모근이 튼튼한 것으로다가.”
The End
---
* 마봉 작가님 4월 19일 발행 <낭만화된 슬픔,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Outis 작가님 댓글에 달린 대댓글
** 찰즈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원작으로 1968년 영화화한 장면에서
*** 영국 왕실의 혼인 과정에서 신부의 순결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이른바 '처녀성 검사(Virginity Test)'가 관습적으로 강조되었던 마지막 사례는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이다. 하지만 다이애나가 산부인과에서 직접적인 신체검사를 받았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왕실이 처녀성에 집착했던 이유는 단순히 도덕적 차원을 넘어 부계혈통 보존에 의한 “왕위 계승의 정당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 마봉 작가님 <백수 스코틀랜드 여행기> 28화를 읽고 적어 본 댓글 픽션입니다. 많은 내용과 표현들을 거기서 빌렸습니다.
https://brunch.co.kr/@mabon-de-foret/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