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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May 27. 2023

블랙핑크와 생텍쥐페리

소녀들을 생각하다

 블랙핑크의 공연을 본다.

 한국말 가사가 나오다가 또 영어 가사가 나오고 뒤죽박죽이다. (요사인 모든 곡들이 그렇고 또 세계적인 호응에 뒷받침하려니 그러겠지만) 노래 선율보다는 춤의 비중이 크다. 빠르고 섹시한 몸짓으로.

 뭐 하나 내 취향이 아니건만(정신 사납다고 생각하면서도) 젊은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넋을 놓고 바라본다. 20 30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늦중년 아줌마가.

왜?

 내가 바라보는 것은 아마도 저들 너머에 있는 가장 매혹적인(보편적이기도 한) 소녀의 모습일 것이다.

소녀들에게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순결함, 맑고 티 없음, 톡톡 튐, 꿈, 경쾌함, 하늘거림, 씨니칼함, 신비함, 까칠함

 남녀노소 어느 누구도 끌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소녀를 인간의 카테고리에 넣는다면 자존심 상해할지 모른다. 우리가 그 지루하며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어떤 새로운 종족의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소녀요정이랄지…. 요정들도 샘내는 존재니까.

 소녀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은 옛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제곡 <What is a youth>이다.

 What is a youth? Impetuous fire. What is a maid? Ice and desire the world wags on.

 얼음과 갈망, 어린 숙녀의 이미지에 어울린다.

 그렇지만 내게 가장 뭉클하게 남아있는 모습은 여러 해 전 생떽쥐페리가 알려준 소녀들이다. 그때 꼭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 기분이었다.

 그의『인간의 대지: 바람과 모래와 별』을 읽다가 5장 <오아시스>에 이르렀다. 당연히 사막 한가운데서 샘물 만난 이야기인 줄 알았다. 뜻밖의 반전이라니. 두 사춘기 소녀에 대한 거였다.     


 나는 어느 들판에 착륙했다. 동화의 나라를 체험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태였다.

수도원처럼 평화롭고 안전하고 듬직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전설의 성.

그때 앳된 아가씨 두 명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엄숙하게 나를 훑어보았다. 마치 금지된 왕국 입구에 선 두 명의 재판관 같았다. 나이 어린 쪽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녹색 나무 막대기로 땅을 툭툭 두드렸다.

 방에서 방으로 옮겨 가면서 나는 향처럼 퍼져있는 오래된 도서관 냄새를 맡았다. 향기로운 그 냄새. 무엇보다 램프를 들고 움직이는 일이 좋았다.

 두 아가씨가 다시 나타났다. 자취를 감추었을 때처럼 신비하게, 그만큼 조용하게. 아가씨들은 식탁에 엄숙하게 앉았다.

 그녀들은 냅킨을 펴면서 조심스럽게 곁눈질로 나를 살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동물의 수에 나를 끼워줄까 말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이구아나 한 마리, 망구스 한 마리, 여우 한 마리, 원숭이 한 마리, 거기에다 꿀벌 떼도 기르고 있었으니까. 그녀들은 순전한 짐승과 속임수를 쓰는 짐승을 구분할 줄 알았고, 여우의 발소리로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도 읽어 낼 수 있었으며-----

 나는 그렇게 날카로운 눈길, 그렇게 올곧은 작은 영혼이 좋았다.

 나의 말없는 두 요정들은 여전히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 이번에는 내가 그 두 어린 숙녀를 은밀히 바라보았다. 평온한 얼굴 뒤에 있는 그 섬세함, 그 조용한 웃음. 나는 그녀들이 자아내는 왕실의 위엄 같은 것에 감탄했다. 그녀들에게는 무언가 우주적인 것이 뒤섞여 있었다.

소녀에서 여자로 건너가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다.      


 <오아시스>에서처럼 소녀의 매력을 정확하게 묘사한 글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소녀 요정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책이 떠오른다.

 블랙핑크가 얼마 전 내놓은 <핑크 베놈>은 예전의 노래들보다 더욱 감당하기 벅차다. 더 현란해졌고 노래 가사도 몹시 자극적이다.

 난 독을 품은 꽃, 네 혼을 빼앗은 다음, 천천히 널 잠재울

 베놈(venom: 독)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꼼짝없이 몰두하고 있는 것은 내 머릿속에 생떽쥐페리와 소녀들이 함께했던 그때 식탁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살모사. 독을 품은 뱀.

 그날 밤 그들의 식탁아래 가볍게 휘파람 소리를 내고 지나갔던 그 고택의 오랜 식구.

 생떽쥐페리의 종아리를 스윽 스쳐 지나갈 때 얼마나 철렁했을 것인가? 그런데 그는 얼떨결에 자연스럽게 웃었고, 마치 최후의 시금석인양, 두 아가씨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네 소녀가, 이미 퍼져버린, 네 눈앞은 핑크 빛, 할 때 마음속으로는 가사에 섬뜩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들을 보고 있다.       


https://youtu.be/zCQMlyXMR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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