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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마저 잘하고 싶었던 병신

두려움과 우울의 시작, 출산


 ‘불쑥’ 갑자기 쑥 나타나거나 생기거나 하는 모양. 유산 이후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불쑥 눈물이 찾아왔다. 

안마의자에서 쉬거나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무는 등의 별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일상생활을 아무렇치 않게 보내고 있는데 불쑥 나타나는 눈물은 공포영화에서 맥락없이 나오는 러브스토리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대로 괜찮아지면 안된다는, 있다가 없어진 존재가 주는 경고였다. 다시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꼭 지켜준다 다짐했다. 이전의 존재가 주는 경고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에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했다. 마음을 졸이던 여러 날이 지나고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는 당일, “나 여기 있어요!!” 라고 말하는 심장은 일정 템포의 북소리처럼 리듬감 있었다. 아이가 쿵쿵 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안쓰러우면서도 위대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엄마는 옆에서 한숨인지 탄식이지 모르게 감사합니다. 를 읊조리시고 순수한 경이를 느끼는 순간 나는 눈물이 흘렀다. 성스럽고 소중한 존재가 내 안에 함께 있구나. 나는..이제 엄마가 됐다.     

 

“엄마가 임신했을 때 아빠가 붕어를 잡아 와서 손질하라고 했는데 글쎄! 붕어가 임신을 한거야. 얼마나 마음이 안좋던지.” 엄마는 그때 경험이 여전히 끔찍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씀하셨다. 임신한 여자가 쪼그려 앉아 배가 불룩 튀어나온 붕어의 배를 가르는 모습.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괴이한 장면은 자주 생각이 났다. 

비록 종(種)은 다르지만 생명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같은 존재로 대우받고 존중받지 못했음이 불편해서였다. 임신 기간 내내 다큐멘터리에서 사마귀가 산란할 때조차 존경의 눈물을 쏟아냈다.      

 

 임신이 안정기에 들어왔지만 계속 불안했다. 출산 선배들이 말해주는 위험에 대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들으면 결코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게, 힘들게 산 하나를 넘으면 이다음에는 가시밭길이 나타나는 험한 여정이었다. 더군다나 30대 후반 나이로 고위험군 산모였기 때문에 기형아 검사 등의 난관을 넘을 때마다 나이로 인해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까 안절부절했다.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할 즈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바로 자연분만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오래 쉬어본 것은 신혼여행이었다. 영업일로는 단 5일이었지만 앞뒤 주말까지 하면 장장 9일로 최장기간이었다. 그래서 출산휴가를 들어갈 때 약간의 설레임도 있었지만 임신 40주차에도 배가 내려 올 생각을 않자 전쟁이 시작됐다. 의사가 하루 4시간은 걸어야 한다고 해서 매일을 7.5km씩 뒤뚱거리며 걸었다. 무릎이 남아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침이면 백근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퉁퉁 부은 발을 운동화에 우겨 넣고 간절한 마음으로 걸었다. 갑자기 진통이 올 것을 염려해서 아기 수첩도 가지고 다녔다. 걷다가 갑자기 진통이 오거나 양수가 터지면 산책로를 벗어나 택시를 잡고 산부인과로 간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출산 가방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마음속으로 즐거운 시뮬레이션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기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 사춘기 아이처럼 조용했다. 


 42주에 유도분만을 결정하고 병원에 갔다. 나는 참 많이 울었다. 

3일 동안 계속된 유도분만과 잦은 내진으로 몸이 너덜너덜해질 즈음에 양수가 터졌다. 결국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내가 출산을 잘 해내지 못해서 첫 시작이 남들보다 뒤쳐 졌다고 생각했다. 수술 후 움직이기도 못하는 몸으로 모유수유를 하고 회복을 위해 다음날부터 죽기 살기로 걸었다.      

조리원으로 온 나는 모유수유에 집중했다. 제왕절개 엄마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수유시간이 되면 폭죽에 불을 붙인 듯 젖이 사방으로 튀었다. 젖양은 많은데 아기가 잘 물지 못해서였다. 아기는 코에 젖이 들어가 컥컥거리는데 수유실장님은 나를 칭찬했다. 새벽 내내 120ml 젖병 두 개를 가득 유축해서 신생아실에 가져다 줄 때면 금메달 리스트처럼 의기양양했다. 살이 덜 빠진 몸 때문에 살이 흔들거려서 더 즐거워 보였을 거다. 신생아실 선생님들은 오늘도 두통이냐며 호들갑을 떨며 젖병을 받아가셨다. 

의기양양한 날이 이어지던 어느 새벽. 

규칙적으로 가슴을 압박하는 유축기, 물총에서 물이 나오듯 뿜어나오는 젖줄기를 보면서 현타가 왔다. 가슴을 동그란 집게로 물어놓은 듯 유축기에 잡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모습은, 너무 제한적이고 원초적이었다. 이제 출산 전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육아를 떠올리면 가장 큰 감정은 행복함 보다 두려움이었다. 아이의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 없이 소중한 

생명이 잘못될까 늘 두렵고 불안했다. 사람 속에서 소란스럽게 살던 내가 출산휴가 3개월, 육아휴직 2개월 동안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고 아이와 집에만 있었다. 하필 남편도 철야 수준의 초과근무로 바쁠 때여서 고민을 나눌 데가 없었다. 내 상황을 나눠 가질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아이의 울음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 덩그러니 있었다. 혼자가 아니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잘하는 것을 추구했던 내가 이런 두려운 감정을 남에게 들킬 순 없었다. 나는 잘하고 싶었으니까 그냥 혼자일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육아는 내 불안정한 마음이 만들어 낸 자책과 외로움으로 늘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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