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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모국경 Dec 06. 2022

제목 : 깐부

소제목 :  국민의 깐부!  대한민국 경찰이 있습니다.

하늘,

파란 하늘,

파란 하늘에 우리 태극기.

(1학년 1학기 바른생활 교과서의 첫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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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자리는 ‘태극기 뷰(view)’ 다.

「하늘, 파란 하늘, 파란 하늘에 우리 태극기」 39년 전 외운 것이 지금껏 삼키지 못하고 입 속에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늘도 주문이 되어 튀어나온다.   


  2019년 1월 24일. 최고의 옷을 고르고, 최고의 화장을 하고, 최고의 향을 뿌렸다. 변신 중인 도시 '세종'과 어울리도록 나 또한 촌스러웠던 어제의 나를 말소시키고 리뉴얼해 내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이 도시도 우린 단박에 변신하지 못했고, 눈부신 신축 건물들 사이 들추진 땅들은 이곳이 촌 바닥이었음을 미처 없애지 못한 증거들처럼 들통나 있었다.

  이런 신구의 섞임 탓인지 첨단에 길들여진 내비게이션은 나의 목적지를 쫒기는커녕 찾아내지도 못했고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는 메시지만 반복하며 책임을 면피하려 들었다. 결국 난 과학 대신 원초적 믿음에 기대어 이목구비 잘 정비된 공무원 관상을 가진 사람들을 골라잡아 길을 물었다.

  물어물어 찾은 행정안전부 건물 초입에 서니 이번에는 그쪽에서 나를 따져 물어왔다. 절차는 꼬치꼬치스러웠지만 공무원증을 지닌 난 허가된 자의 당당함에 우쭐해했고, 우쭐함이 당겨 올린 어깨는 어서어서 들어가고 싶은 조바심마저 부추겼다. 그렇게 들어앉은 자리가 지금 나의 자리 ‘태극기 뷰(view)’ 다



1. 재난

  나는 ‘재난관리’ 업무를 한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상황실은 각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을 한 곳에 모아 전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난을 365일 24시간 예방하고, 대비하고, 대응하도록 하는 국민안전의 최전방 부서이다. 하나, 여럿이 함께 모여 대비하고 또 대비한들 누가 감히 재난을 점쳐 막겠는가? 상상력이 빈곤해서가 아니라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현실이, 휘모리장단에 맞춰 춤추듯 날리는 현장이 그러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수십 개의 매뉴얼이 있다 한들 과거의 재난을 토대로 만들어진 매뉴얼은 미래의 재난을 점치긴 부족했고, 부적 한 장 써서 인생살이 날림으로 해결하듯 매뉴얼 속에 해결책을 절로 품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게다가 현재의 모든 것들은 내일을 준비하듯 변화로 꿈쩍거렸다.  사회는 신종 재난을 낳고, 신종 재난은 변이를 낳고, 변이는 또 다른 변이를... 한 편의 신작 드라마 발표하듯 뉴스를 통해 재난의 창조성을 발표하고 있었다.



2. ‘일만 원’ 짜리 재난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하며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대 흥행이었다. 사회의 지질한 이들을 딱지치기로 모았다. 딱지치기로 싸대기 맞은 사람들의 목숨 값은 인당 일억 원. 각자가 가진 일억 원짜리 명줄을 걸고 456억 원을 차지하기 위한 게임의 드라마다.

  누군가 나에게 ‘재난’이 무엇이냐? 물어온다면 난 서슴지 않고 영화 속처럼 ‘빈곤’이라 대답할 것이다. 재난(災難)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공평한 것이지만 그 영향력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여성 등 소위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더욱 혹독했다. 하지만 이들 또한 보살핌의 약자가 되기 위해선 전제 조건이 있었다. 바로 가난.  

  공평한(?) 재난(災難)을 공평하지 못하게 만든 진범은 재(災)가 아니라 재(財)였던 것이다. 영화 「기생충」 역시, 폭우가 땅끝을 향해 꽂으면, 부잣집 꼬마에겐 고급 방수 텐트를 치고 놀 수 있는 ‘재미’가 되지만 빈곤한 자들에겐 지하 셋방 화장실 변기 뚜껑을 막아야 하는 ‘재난’이 된다. 영화라고 설정이라고 믿고 말하고 싶지만, 영화는 현실의 파생이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의 상징물인 물과 불이 재난의 거침없는 수괴인 줄만 알았다. 화폐를 이용하여 만든 대비책 앞에 그 위세가 꺾이는 걸 경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폭우가, 폭염이, 혹한이, 대설이 그 어떤 것이 불어오던, 닥쳐오던, 밀려오던 재난의 위세는 일만 원짜리 시퍼런 생기 앞에선 주눅 들고 시들해 버렸다.

  「오징어 게임」 드라마 속 게임 참가자들 또한 개인의 잘못이든 사회의 잘못이든 그 탓은 별론으로 하고 어쨌든 현재는 시퍼런 생기를 지니지 못한 기죽은 빈곤자들이다. 재난은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회가 함께 그 고통에 대해 들어줘야 하고 함께 보살필 의무가 있는 약자인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이것이 내가 일하는 곳에 우릴 뭉쳐 놓은 이유다.



3. 너무 무서운 재난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 가보자, “나 너무 무서워 그만해” 서로 죽고 죽이는 공포 속에서 일남이 소리친다.  

  총 6개의 게임, 6개의 게임만 통과하면 승자가 된다. 수백억 원의 돈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최후 1인 만이 승자가 되는 게임이 아니다. 함께 여럿이 승자가 될 수 도 있는 게임이다. 그럼에도 싸워서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한 채 함께 할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린다. 달고나 뽑기에서 도구나 방법을 공유할 수도 있고, 징검다리를 건널 때도 유리 기술자의 능력을 활용해 함께 통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왜”라고 일축한다. 그렇게 극한에 몰린 인간의 이기심을 게임의 설정자는 즐긴다.  


  눈 내리는 밤, 길바닥에 쓰러져 얼어 죽어가는 노숙자를 보며 일남은 기흥에게 내기를 건다. 그리고 일남은 자신이 내기에서 이길 것을 확신하며 말한다.  

  “자네 아직도 사람을 믿나?”

  아무런 도움의 손길 없이 내기의 종료 시간에 다다를 때쯤, 노숙자를 스쳐 지나갔던 노랑머리 행인이 다시 순찰차와 함께 나타난다.

  이 장면을 두고서 난 두 손뼉을 치며 지인들에게 우겼다.  

  이것이 국민들이 품은 마음이라고. 경찰이 국민들을 지켜주고, 함께 해 줄 것이라는 믿은 마음이라고. 그 믿음이, 그 신뢰가 무의식 속에서 나타나 만들어진 명장면이라고. 하지만 나의 말에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았다. 경찰관 조차도...

  물론 작가나 감독이 대한민국 경찰 활동에 거창한 의미를 담아 경찰의 활약상을 보여 주고자 순찰차를 출동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순찰차는 있으나 마나 한 행인 1과 같은 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만...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살벌한 게임을 혼자 감당하려는 (여) 주인공 '새벽'에게 (남) 주인공 '기훈'이 전하는 대사처럼, "사람을 믿는 건 믿어서가 아니라 기댈 때가 없어서 그런 거다."

  그렇다. 믿어서가 아니어도 괜찮다. 기댈 곳으로 ‘112’ 면 충분하다.

  국민이 경찰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냥 기댈 때, 애초 약속이 그러했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 줄 기댈 곳으로 사회는 경찰을 두었다.   


  한 때는 경찰관으로서 지녀야 할 현장 최고의 가치가 진정성이라 믿었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 생각에 나를 가두고 스스로를 도취시켰다. 그러나 진심 어린 마음이라는 게 고작 입으로 뱉는 말 무게만큼 밖엔 되지 못했다. 진심을 품는 것도 진심에서 벗어나는 것도 자유로웠고 가벼웠다.  

  마음에는 플레임이 없다. 아침의 이타심이 저녁의 이기심으로, 어제의 이해가 내일의 비난으로, 마음은 얼마든지 제 멋대로 간사했고 들키지 않을 만큼 위장술에도 뛰어났다. 그제야 알았다. 우러나온 마음이 아니라 지어먹은 마음이라는 것을. 내가 나를 속인 지어먹은 마음이고 억지여서 버티기가 버거웠다는 것을.  그래서 마음을 버렸다. 버거워서 버렸다. 그러고 나서 내가 해야 할 의무로서만 나를 현장에 세웠다.


  태극기가 펄럭인다. 내가 바라보는 태극기는 365일 24시간 대한민국 경찰의 활동처럼 펄럭인다. 그런데 매일 저렇게 펄럭이는 건 국기라 국민을 사랑해서도 태극기 가슴에 바람이 일어서도 아니다. 법이 그렇게 시켰다. <대한민국 국기법 > 제8조 제3항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공공기관의 청사 등에는 국기를 연중 게양하여야 한다." 태극기도 경찰관인 나도 우린 마음 이전에 국민을 향해 쉼 없이 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이다.



4. 그리고 ‘깐부’

  탈북자인 새벽은 승자가 되지 못하고 죽는다. 하지만 죽기 전 속고만 살아온 이 세상에서 기댈 곳을 새벽은 찾게 된다. 그리고 동생을 부탁한다. 동생은 비록 누나를 잃었지만 따뜻한 붕어빵을 작은 손에 지어주는 깐부, 붕어빵 온도를 가진 할머니를 얻게 된다.

 

  우리는 재난과 함께 살아왔다. 그때마다 재난을 극복한 건 단상 위에 선 한 사람의 소리 높은 목청이 아니라, 입 가리고 말없이 옆 사람에게 마스크를 건네던 모습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던 소리 없는 믿음, 서로의 깐부가 되어 주는 무의식적 선에 의해서였다.  


  태극기가 또 펄럭인다. 언제나처럼 그냥 펄럭이기만 한다. 국기라고 딱히 국민에게 신뢰받기 위해, 믿음 주기 위해 특별히 애쓰며 펄럭이지도 않는다.

  늘 그 자리에 게양되어 오늘도 나와 함께 하는 게 태극기 역할의 전부다. 그런데 그 밋밋한 태극기에 나의 마음이 자꾸만 홀리게 된다.


  어쩌면... 진심을 다한다는 건, 단박의 결심으로 변신하듯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게양됨으로써, 꾸준히 함께함으로써 홀리게 되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슴 채우며 들어온다.


21년 10월 세종시 마음로 100번지에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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