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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모국경 Dec 06. 2022

제목 :  한글 유전자

소제목 : 한글에 담긴 공감 유전자  

오랜 시간 이방인으로 분류되어 살아왔다.  

타 지역을 전전하는 이방인의 삶을 오래 살다 보면 어느덧 회귀본능을 가진 고향마저 바래지고 옅어져 타향처럼 느끼게 된다. 고향으로의 회귀마저 잃은 이방인의 삶이란, 누가 무섭게 표정 지은 것도 아닌데 지레 겁을 먹고선 내가 나를 주눅 들게 한다.

어느 날은 주눅의 무게가 감당치 못할 만큼 지나쳐 3일 내리 눈물로 쏟아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울음에 대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울음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위로받지는 못했다.  


그때부터였다.  

위로해 줄 사람을 찾다간 내 안의 통곡이 한 방울의 눈물도 못 짜내게 굳어 버릴 것 같아, 대신 책을 찾았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98, 돌베개)이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골랐다. ‘감옥’이라는 특수한 거처에서 풍겨오는 불행감이 나만 불행할 것 같던 갇힌 소외로부터 석방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타인의 불행을 발판 삼아 나의 불행을 벗어나려는 탈출 계획은 불순한 의도 때문인지 틀어졌고 도리어 글에 담긴 아픔이 전해져 나도 따라 아팠다. 곁에 둔 것이 책이 아니라 사람이라 착각들만큼 더불어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아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옛말을 증명이나 하듯 아픔의 비애는 줄고, 비애가 줄어든 그 자리에 ‘아프면서 큰다’는 말이 채웠다. 그렇게 난 한 권의 책으로 거짓말처럼 위로받고 성장도 하고 있었다.

  

책과의 관계가 휴대폰보다 친할 때쯤,  난 또다시 먼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또 이사에 이번엔 3일의 소 울음을 울지 않았다. 다만 능숙하게 처리해오던 집 계약일에 착오가 생겨 계약한 입주 날짜와 이삿날이 틀어졌고 그로 인해 낮에는 도서관에서, 밤에는 찜질방에서 시간을 때우며 지내야 했다. 

이것이 국립세종도서관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국립세종도서관은 독특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이라 말했을 때 그 명사(名詞)가 그려주는 선입견 내지 편견의 이미지는 네모 반듯함인데 국립세종도서관은 반듯함과는 거리가 먼, 나 같은 도서관계의 이방인이었다.  

미국인 작가 제인 마운트는 『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2019, 아트북스)에서 국립세종도서관을 ‘도서관의 생김새가 책장을 넘기는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라고 표현하면서 가보고 싶은 도서관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사실 국립세종도서관의 생김새는 ‘접시’다. 누구는 노아의 방주 같다고도 말하지만 ‘지혜를 담아내고 있는 커다란 접시’라는 의미로 접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접시는 하도 크고 굳건해서 821,214권의 지혜뿐 아니라 사람도 능히 품어 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듬직한 도서관이 갑자기 휴관에 들어갔다. 40년 생명을 목표로 탄생한 도서관이 10년도 채 되지 않아 안전에 탈이 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휴관한 지 1년 여 만인 오늘에서야 재개관하였다.  

다행히 건강은 회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안전부실 원인에 대해 사람들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도서관답게 네모 반듯반듯하게 지었으면 튼튼했을 것을 뭐 하러 유난스럽게 지어서는...” 무너진 원인이 도서관의 유별난 모양 탓인 양 덤터기 씌우고 있었다. 도서관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던 소리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무리들만 살아남은 것처럼 굴었다. 시공 품질 관리가 미흡했던 것이 원인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보다 풍문의 입김이 더 셌고, 앞으로 지어질 관공서는 차분하면서도 반듯한 이미지가 투영되도록 하고 복잡·현란한 디자인은 적용을 금지한다는 설계 기준도 하달되었다. 결국 공공건축물은 천편일률적으로 ‘네모 반듯하게’가 안전을 담보하는 정답으로 처리됐다.


한 가지 정답만을 추구해 가는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고 위축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창의성이다. 나 또한 ‘정답 찾기’ 교육으로 창의성이 떡잎부터 잘렸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월례고사 때 ‘째 먹는 생선을 쓰시오’라는 주관식 문제가 출제되었고 난 갈치라 적었다. 하지만 그 시절 교과서의 정답은 멸치였다.

가난한 우리 집에서 멸치는 머리에서 똥까지 먹는 '통째' 먹는 생선이지 '뼈째' 먹는 생선이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뼈째 먹는 생선은 갈치였다. 결국 우리 집 가난은 내 시험지에도 내 자존심에도 금이 가게 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서 뼈째 먹는 생선은 멸치로 획일화시켰고, 갈치, 전어, 양미리, 가자미등은 모조리 지웠다. 그리고 바싹 튀기거나 조려서 생선을 뼈째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창의적인(?)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답은 나의 창의성이 무럭무럭 자랄 수 없도록 떡잎부터 잘 잘라주었다.  

하지만 고추장에 듬뿍 찍어 통째 먹던 멸치, 그 오답의 맛을 몸이 기억하는 바람에 가난을 해결한 ‘해답’으로까지 부정할 순 없게 했다.  

해답은 나의 가난에 실용적으로 공감해 주었고 맛있는 위로까지 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한 창의적인 생각들과 사회를 발전시킨 창조물들은 너도 나도 달달 외워 써낸 정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고, 누군가의 문제에 함께 고민하며, 누군가의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 주고자 하는 공감에서 찾은 해답이었다.


600년 전에도 백성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걸었던 위험 당당한 인물도 있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는 중국의 글, 한자를 빌어다 썼고 성리학에 심취한 신료들과 유생들은 남의 글자에 공식적 지위와 권위를 부여해 백성들을 어렵게 했다. 온종일 일해도 먹고살기 빠듯한 살림살이가 백성들의 평균치 처지였고, 그런 평균치 백성들이 샌님 닮은 한자를 배운다는 건 당찮은 일이자 태평성대에서 양반들이나 할 짓이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통과 경청은 목민관의 바른 자세라 백성들과 소통하겠다는 소리를 열심히 외쳤다. 하지만 글을 몰라 말문이 원초적으로 막힌 평균치 백성은 목민관이 외치는 소통과 경청을 마음의 소리로 듣기보단 목청소리인 행사 구호나 취임사 단골 정로만 들어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달랐다.   

세종에게 백성은 바라보는 ‘관조’가 아니라 함께하는 ‘관계’였다.  

세종은 소통이든 경청이든 그 이전에 말문부터 열어주고 말길부터 터 주어야 한다는 앞과 뒤 이치에 맞는 생각을 했고, 평소 백성의 삶을 실제 체험하면서 익히고 느낀 ‘정직한 공감’으로 요새 식으로 표현하면 〈백성 눈높이 맞춤형 문해 정책〉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그 증거로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 기사› 를 인용한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子 )를 만들었으니... (후략)


우매한 백성이라도 ‘하룻밤이면 익힐 수 있는 ‘ 가장 쉽고 가장 단순한 글자를 만들었다

쉽고 단순한 한글이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과학적인 글이라는 입증까지 되면서 그 우수성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세계 문자 올림픽대회’를 통해서도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번쩍번쩍 빛나는 자랑스러운 글임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하였다. 사실 한글의 위대성은 이런 대회 이전에도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 공로상의 이름으로 세종대왕의 이름을 넣어 ‘세종대왕 문해상’으로 결정함으로써 이미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한글이 지닌 진정한 우수성은 백성을 진실로 사랑한 마음에서 탄생한 ‘선(善)의 과학’이자 ‘공감의 과학’이라는데 있었다.  

  

최근 발간된 독일 정신과 의사이자 세계적인 과학자인 요하힘 바우어의 책 『공감하는 유전자』(2022, 매일경제신문사)에서는 말한다. 지난 40년간 읽힌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는 틀렸다고.  

인간은 어떤 삶을 살도록 정해진 걸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책은 유전자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제 아무리 우월해도 혼자서만 행복할 수 없다고 한다. 서로 간에 협력과 사랑을 지향하는 이타적 삶을 살아옴으로써 생존에 더 유리한 존재로 진화했고, 또 공감하며 선한 삶을 살수록 좋은 유전자가 반응하고 활동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다고. 철학자가 아닌 과학자가 실험하고 관찰하고 증명함으로써 좋은 삶이란 ‘더불어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는’ 삶이라고 밝혀내고 있다.


공감하는 능력이 별스러운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처지를 내 것처럼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이라 한다.  누군가의 아픔이 무관심에 밀린다면, 누군가의 삶이 편견에 밀린다면, 누군가의 생각이 천편일률에 밀린다면, 우리는 한글을 창제한 우리 조상들의 창의적 공감 유전자를 잃어갈지도 모른다. 아니 공감하는 유전자가 사위어 당장 내 건강에 위협받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난 시간 제아무리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세뇌당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서로 경쟁하며 계층을 구분 짓고 분류하여 기득권을 만들며 살아왔다 해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서로가 통(通)하여 함께 잘 살아가도록 하는 ‘한글 유전자’, '공감 유전자'의 피가 흐르고 있기에... 오늘도 관조가 아닌 관계 속에서 나의 행복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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