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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모국경 Dec 06. 2022

제목 : 대한국민 경찰조서

소제목 :  문)  당신도 괜찮은가요

경찰서는 경찰로 살아가는 나에게 운명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점집(占집)은 때때로 나의 운명을 보러 가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서든 점집(占집)이든 다녀온 사실을 타인에게 먼저 자랑삼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경찰서는 살면서 되도록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각인되어 있고, 점집 또한 미신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찾는 암묵적 폄하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이렇듯 찾아가는 목적은 달라도 대화의 소재로써 꺼림의 감정도, 감춤의 침묵도 동일합니다. 

헌데, 난 이 두 곳을 특별히 감추려 하지 않을뿐더러 되려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기꺼이 첫머리에 내세웁니다. 


처음 점집(占집)을 찾은 것은 경찰 공부를 시작한 지 3년 차 되던 해였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는 횟수만큼이나 자신감도 추락했고 합격의 갈망은 강력한 불안에 밀려 점점 마음을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포기의 권유도 여기저기서 들어옵니다. 악다구니의 버팀목도 삭아 해집니다. 하지만 한 톨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게 ‘경찰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듣고 싶었습니다. 이왕이면 미래를 예언하는 전문가(?)에게서 말입니다.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야, 당신은 총·칼을 지니는 직업이 좋아” 용하다 소문난 역술인을 찾아 들은 첫마디였습니다. ‘총, 칼? 총, 칼이면 경찰이잖아’ 순간 제멋대로의 해석이 외곬으로 박아 버렸습니다.  

그 후 운명인지 숙명인지 그도 아니면, 운명 엇비슷한 우연인지 몰라도 시험에 합격했고 경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칼이나 총을 직업상 도구로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칼은 지급하지도 않습니다. 총은 대여품으로 지급되나 이 또한 사용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총기 사용에 대한 보고서와 책임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오른쪽 옆구리에 달린 3.8 권총 위로 숨 가쁜 손이 절로 닿는 순간에도 절차에 따라 지켜야 할 법과 매뉴얼들이 현장과는 속도를 달리 한 채 차분하기만 합니다. 결국 찰나의 망설임을 지나 총에서 손을 비켜 놓습니다.  

게다가 가만 생각해 보면 칼을 사용하는 직업은 요리사나 의사이고 또 총이라면 경찰보다 군인이 더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총, 칼을 도구로 사용하는 직업이 경찰이 아님을 깨닫는 데도 20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만큼 경찰을 천직으로 알고 지내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단단히 못 박힌 생각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경찰의 도구는 비록 범죄라 하더라도 싹둑 잘라 단절시키는 ‘총·칼’이 아녔습니다. 경찰의 일은 말과 글.  즉 ‘함께’ 하는 소통의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형사법 체계에서 물어 답하는 과정은 글인 조서로 작성되고 사실을 밝혀내는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이때의 문답 역시 법이 필요로 하는 구성요건적 사실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로 인해 들어야 할 본질이 외면되기도 하고 설령 말하고 들었어도 법의 요구를 벗어난 말들은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법 밖으로 밀려 삐죽거리는 말들을 끄집어내어 보면 또 그만큼 진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진실을 보고 듣고 말하는 눈과 귀와 입이, 나아가 몸짓의 언어까지 들어내는 열린 가슴과 날쌘 눈치가 필요했습니다. 


경찰이 되어 들은 첫소리는 ‘욕설’이었습니다.  

개인별 할당된 범칙금 스티커를 끊어야 하는 시절이자 주취자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과도기(?)에 경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라 부르고 짭새(잡는 새끼의 줄임말)라 들었습니다.  

현장은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패스트푸드적 욕들의 체험장이었습니다. 달달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짝다리를 집고 서지 않으면 주저앉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언어는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욕이라 하여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를 듣고 일주일을 듣고 그렇게 수년이 지나면 귀를 넘어 몸의 세포까지 익숙합니다. 더는 떨지 않습니다.‘모가지를 따겠다’ 해도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현장의 굵직한 근육이 생긴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퉁치기엔 아직도 난, 현장이 무섭습니다. 다만 그 욕설들이 위협적이지 않는 건 그들이 토해내는 욕설들이 아프게 살아온 삶의 고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욕의 소리가 언제부턴가 짠해져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욕설은 소위 교양 없는 사람들이나 쓰는 언어가 아니라,  삶의 ‘거친 속사정’을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능적 몸부림으로 습득한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욕을 듣고 배우고 익혔습니다. 이것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또 다른 곳을 이해하는 나의 ‘배움’이었습니다. 



두 번째 소리는 ‘몸짓’입니다. 무언(無言)이지만 가장 요란합니다. 

현장은 언제나 느닷없는 마주침입니다. 오늘도 누군가의 죽음을 대면합니다.  자살입니다. 자살은 온몸으로 아우성친 소리입니다. 안타까움과 아픔이 먼저 찾아오지만 그 감정들 끝엔 습관적으로 갖는 중얼거림이 있었습니다.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된다’는 말속엔 ‘사실과 진실’이 함께 합니다.  

공유되지 못한 경험이기에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무책임한 선택 내지 죽을 용기로 살지 하는 나약한 마음으로 치부해버리는 비꼼과 비난의 ‘진실’이 숨은 것입니다.  

주검으로 발견된 실종자를 대면하는 순간 재빠르게 발견치 못한 미안함과 무력함으로 가슴이 아리어 와도 그도 잠시 뿐 업무 담당자라는 건조한 위치로 이내 돌아옵니다. 아프다 하여 일상화된 일 속에서 매번 가족 같은 감정을 넣어 소모할 수도 없으며, 과도한 감정은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에 오히려 감정을 섞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 또한 여기까지만 사실입니다. 진실은 그 아픔이 나의 경험 내지 내게 닥친 처지가 아니어서 온전히 나의 아픔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얄팍한 공감으로 적당히 타자화 된 아픔인 것입니다. 

  

결국 ‘이해할 수 없다’ 말하는 것은 타인의 삶에 무지했음에도, 통념상 이해받지 못한 선택을 했다는 이유로 ‘구경 관계’에 있는 내가 6할의 비난을 숨긴 채 내뱉은 폭력이었습니다.   


  

마지막 소리는... 소리조차 숨죽인 ‘침묵’이었습니다.  

많이 아파오면 모든 것이 안으로 숨어들어 소리마저 삼키고 고요해집니다. 그럴 때면 진통제를 찾아 삼키고 통증을 재웁니다.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이내 몸은 그 효과에 길들여져 반복해 삼키는 나쁜 버릇을 받아 드립니다. 이것은 몸이 내는 소리를 진통제로 입막음할 뿐 진정(眞情) 생각해 주지는 못한 것입니다. 


몸의 통증 넘어 사회 통증도 매한가지입니다. 

한 자리에 모이면 그곳에 20프로는 성폭력 경험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폭력뿐만 아니라, 학교폭력, 가정폭력, 아동·노인학대 등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피해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암수범죄들이 많습니다.   

오락실 구석진 한편에는 24시간 매 맞는 두더지 게임기가 놓여 있습니다. 돈을 지불한 강자(게임자)는 두더지를 망치로 마구 때려 누릅니다. 반항하여 두더지가 대가리를 들어 올리면 또다시 때려 누릅니다. 두더지가 대가리 내밀기를 포기할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립니다. 그렇게 두더지를 향한 폭력은 타임 오버가 되어서야 끝이 납니다.  

폭력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 역시 꺼내기 힘겨운 소리를 용기 내어 밖으로 내밀어 봅니다. 하지만 사회는 편견을 장전한 눈총과 그마저도 눈 돌린 무심으로 자신을 지킬 힘도, 대항할 무기도 없는 그들의 아픔 위에 두더지 망치로 대가리를 때려눕히듯 ‘고의 없는’ 매질을 세차게 해댑니다.  

손찌검에서 매질, 매질에서 다시 손찌검으로, 이러한 공포의 반복 경험은 더는 자신의 아픔을 열지 않게 하고, 마음을 열지 않게 하고, 나아가 입마저 열지 않는 숨죽인 ‘침묵’만으로 자기 간수를 하게 합니다.  

이는 피해자의 아픈 소리가 더는 사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진정(鎭靖)시켜 순식간에 해결한 것일 뿐, 아무도 진정(眞情)으로는 생각해 주지 못한 것입니다. 


욕설과 몸짓 그리고 침묵, 이러한 소리들의 외면은 우리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비슷한 모습으로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잠시 잊은 탓입니다. 나도 아플 수 있다는 걸 잠시 깜박한 탓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마스크로 가린 얼굴, 힘껏 뻗어도 손조차 맞잡을 수 없는 몸과 몸 사이, 사람의 온도가 부담이 되어 버린 현실, 그로 인한 간격의 필요가 서로를 더욱 외면하게 한 탓입니다. 

그런 탓에 작금의 시대를 개인주의를 넘어 접촉조차 꺼리는 ‘언택트(Untact) 시대’라고 까지 합니다. 하지만 관계로 뜨개질한 우리의 행·불행이 자본주의 밥그릇처럼 사유화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누구도 오롯이 따로 떼어낸 혼자의 안식, 혼자의 공간, 혼자의 삶 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잠시 잊었을 뿐 모르지 않습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것을, ‘겹겹이 쌓인 망각 밑에 사랑이 묻혀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제한된 몸을 대신해 마음이 다가갔습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온기 없는 마스크로 포장하여 ‘안전’을 전달하는 기막힌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고, 타인을 위해 멈춰 선 ‘질서’의 여백에는 괜찮냐는 서로의 안부를 챙겨보는 메시지들로 채웠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염려하며 당장부터도 가능한 ‘사람의 방식’을 찾아 함께 움직였습니다. 

  

이런 아픔을 함께하는 숱한 사람들 사이사이 대한민국 경찰이 존재합니다. 경찰 신고 112는 국민들이 자신의 아픔을 일일이 알리고 도움을 청할, 마지막 보류로 삼은 결집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경찰 조서는 그 소리들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문) 더할 말이 있나요   

답) 아니요 없습니다.   같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대화에서 나오는 기성품(旣成品) 문답으로는 결코 듣지 못합니다. 사람 따스함이 전해지는 가까운 자리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경찰이 서 있어야 할 국민의 옆 자리는‘안전과 질서’를 핑계로 선뜻 내어 받는 공터가 아니었습니다. 가을 추수를 위해 인내와 성장의 계절이 먼 저였듯, 단단한 전문성과 공감의 진정성을 갖춘 후에야 얻을 수 있는 적실(赤實)한 획득임을, 빈약한 성과를 손에 쥐고서야 알았습니다.  

결실의 계절 가을 한 복판에는 언제나 경찰의 날(10월 21일)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 년에 한 번쯤은 경찰관인 나의 쓸모를 생각하게 합니다.  

현장에 ‘발’을 둔 정직한 최선이었는지, ‘가슴’에 물어 부끄러움은 없었는지, ‘이성(머리)’적 판단에 넘치거나 부족함은 없었는지, 발에서 가슴, 머리에 이르기까지 거꾸로 뒤집어 전체의 나를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그 반성의 기초 위에 내일도 경찰로 살아갈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 상한(上限)을 고민합니다.   

이렇듯 나의 운명은 정직한 쓸모에 있음을... 20년 전 역술인이 나에게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야'하고 에둘러해 준 말이 아닐까 짐작이 듭니다. 



끝으로, 말의 이치가 부족하면 말의 박자만 가지고도 뜻을 전하고 때로는 이치도 박자도 부족하면 그 부족함을 드러내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합니다. 하지만 부족함 마저도 부족하여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해도,  

나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어떤 이가 따사로이 ‘챙겨 온 한마디’를 나 또한 누군가에게 건네는 것이 ‘오늘의 작은 소임’ 임을 알기에, 가을 햇빛 나눠 앉은 *마음로 100번지(番地)에서 용기 내 말해봅니다. 


문) 당신도 괜찮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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