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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모국경 May 09. 2023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뭘 하면 된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책 <세이노의 가르침> 54페이지 중간쯤에 나오는 문장이다.


난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소설 같은 책이 아닌 이상 굳이 페이지 순서대로 책을 읽지 않는다.

이건 공부할 때 생긴 버릇이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공부할까? 궁리하다. 그날 내가 끌리는 곳, 즉 책을 펴는 시점에 공부해 보고 싶은 부분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 두 가지 장점이 있다.

1. 공부의 시작이 재미있어진다. 그리고 이 재미를 다음 공부하고 싶은 부분으로 옮겨 갈 수 있어서 공부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예를 들어 우연히 영화 '모비딕'을 보았다면 '헌법'의 양심의 자유부터 오늘 공부를 시작한다거나, 요즘처럼 마약이 이슈가 되어 자주 기사에서 보게 되면 '수사실무'의 마약에 대한 부분부터 공부하는 식이다.)

2. 처음에는 꼼꼼하게 공부를 하지만 중간이나 마지막 부분은 허술하게 되는 공부를 막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형법 총론과 각론이 있고 각론에서 다시 국가적 법익, 사회적 법익, 개인적 법인 순으로 목차가 있다면 순서대로 보게 되면 그다지 출제비중도 많지 않은 총론의 앞부분은 역사까지 완벽하게 암기하려 들지만 정작 중요한 각론에서 허술하게 된다. 그건 책 밑을 보면 알 수 있다. 집중해서 많이 본 쪽은 까만 손때의 농도가 다르다. 그런데 보고 싶은 부분부터 공부하면 중요한 부분을 오히려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공부의 효율성이 있다.) 단, 이것은 '용두사미'의 성향을 가진 지극히 개인적 공부법이다.


여하튼, 이러하다 보니 공부뿐 아니라 책 읽기도 내가 고 싶은 곳부터 시작한다.

왜 이 말을 하냐고 하면 700페이지가 넘는 <세이노 가르침> 책 중에서 54페이지 부분에 나온 문장에 꽂혔다고 해서 다른 곳은 읽어보지도 않고 시작점에서 꽂힌 게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싶어서다.

거의 다 읽었고 남은 몇 부분을 읽다 만난 문장이다.

책 속에는 저자의 표현처럼 '나는 내 글 속에 돋아 있는 바늘들에 당신이 제대로 찔리고 피나는 노력 ~~~~' 소위 뼈 때리는 말이 많다. 그 수많은 뼈 때리는 말, 찔려 아픈 말보다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뭘 하면 된다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에 읽기를 멈추고 생각하게 했다.


과거에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선명히 알고 있었고, 변수 또한 적어 변수의 영향력까지 계산되었을 때는 세이노의 가르침대로 나 역시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면서 그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목표(꿈)만 있고 나머지는 다 알 수 없는 답보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방법을 모르니 쓸모 있는 노력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되고 그래서 헛된 애를 쓸까 봐 시작조차도 미적 되게 된다. 변수 또한 크기가 가늠되지 않아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책을 거진 다 읽고 나서 마주한 '도무지 할 것이 없었다.'는 다르게 다가왔다.

할 것이 없었는 게 아니라, 어쩌면 하고 싶지 않아서 힘든 게 싫고 귀찮아서 나를 합리화시킨 문장이었다.

변수 또한 계산되는 변수라는 건 없다. 그래서 변수인 것인데. 그래서 인간은 그저 인간의 노력을 다한 다음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고, 하늘은 그 노력을 외면하지 않아서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도 돕는 것인데 모든 걸 내가 하기 싫어서 합리화시킨 꼴이었다는 걸. 그 문장을 보고서야 눈치를 챘다.

세이노는 말한다. 필요 없는 공부는 없다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자신은 '종교'까지 공부했었다고.

일도 열심히 하라 한다. '믹스커피' 한 잔 타는 것조차도 제대로 하라 가르친다.


할 것이 있다. 할 것이 있었다.   

설령 그 움직임이 내 꿈을 향해가는 '고속도로'를 만들어 주는 수단은 아니어도 '길'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삼시 세끼를 제대로 먹지 못했던 과거의 생활로 되돌아가 그 생활이 반복된다 해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나의 아들들에게 '할 것이 없어 못했다'는 하찮은 변명을 '도무지'까지 앞세워 합리화시킨 못난 모습으로 존재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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