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 「스토너」
선혁아. 요즘 아빠가 육아휴직 중이라 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 아침에 같이 놀이실도 가고, 오후에는 놀이터도 가고, 엄마와 함께 산책도 하는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어. 너와 가장 오랜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지금을 네가 기억할 수 없다는 게 아쉽지만, 아빠에게는 정말 뜻깊은 하루하루란다. 아빠의 삶을 이야기로 써 내려간다면, 육아휴직 중인 이 6개월이 가장 따뜻한 페이지가 될 거야.
아빠는 오래전부터 삶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품고 있어. 우리의 삶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이야기이고, 이야기 하나하나가 기록되지 않는 책으로 존재한다고 말이야. 그 책 속에서 우리는 모두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거야. 삶이 이야기라는 말은 낭만적이지만 조금 무서운 생각이기도 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거든. 태어나는 시간도, 삶을 마치는 시간도, 언젠가 만날 운명의 상대에 대한 모습이나 목소리 심지어 성격까지 우리가 미리 정할 수 없어. 모든 것이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드러나게 되거든. 이야기의 작가를 만나서 앞으로의 방향을 묻거나 의논할 수도 없지. 심지어 우리의 삶에 작가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있다고 한들 살아가는 동안 만나볼 수는 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 마주하고 스쳐가는 모든 것들이 작가인건 아닐까? 삶에 영향을 끼치는 그 모든 것들 말이야. 부모님, 햇살, 친구, 친척, 동네 이웃과 반려 동물, 좋아하는 가수, 먹는 것과 입는 것, 어느 날 문득 귀 기울여 듣게 되는 바람소리까지도. 그 모든 것이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가인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에 작가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각자 자신일 거야. 그리고 이 이야기는 미리 쓰여 있는 이야기가 아니란다. 우리의 남은 이야기들은 언제나 지금부터 다시 써 내려갈 수 있거든. 주인공에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야기. 그게 우리의 삶일 거야.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품고 있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하나하나가 다 너무나 흥미롭다는 거야. 엄청난 부자이거나, 엄청난 가난을 극복하거나, 왕자님이거나, 공주님이 아니어도 우리의 삶 모두가 흥미롭고 의미 있단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책이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생소한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그런 평범한 삶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은 책이 있어. 바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란다. 1900년 대 초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야. 역사에 기록되거나 기록되어야 할 인생을 살지 않은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인데, 정말 신기하게도 아빠에게 가장 큰 여운을 남긴 소설이 되었단다. 주인공인 스토너는 동료들이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에도 학교에 남고, 아내와 특별한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일적으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갈등과 오해, 사랑의 감정과 열정, 그리고 무심함까지. 그저 현실 속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아빠는 스토너를 응원하고, 공감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단다. 아빠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책의 주인공보다 더 깊고 무겁게 마음에 내려앉았어.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삶에 대한 마지막이자 첫 번째 질문
"넌 무엇을 기대했나?"
존 윌리엄스 「스토너」中
이 짧은 문장이 며칠째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아. 처음에는 허무함이 몰려와서 마음이 텅텅 비었는데 그 빈 공간으로 지나간 의미들과 새로운 의지가 깃드는 것을 느꼈어. 지금까지의 아빠의 삶과 앞으로의 남은 삶에 무엇을 기대했고 기대해야 할까? 나의 이야기는 어떻게 쓰일 것인가? 그 이야기의 뒷부분은 충분히 즐거울까?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그 문장을 씹고 또 곱씹었단다.
확실한 건 선혁아.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우리의 삶도 개연성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단다. 다시 말하면, 삶이라는 이야기 역시 그저 아무렇게나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거야. 우리가 어제 한 선택이 오늘, 그리고 내일, 어쩌면 내년의 나의 이야기에 영향을 주고 있어. 그리고 그 덕분에 삶이라는 이야기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조금씩 꾸며나갈 수 있단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빠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지는구나. 아빠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오늘 밤에도 곰곰 생각하다가 잠들 것 같아.
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빠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구나. 그리고 너의 이야기가 어떻게 쓰일지도 너무나 궁금하구나. 이만 마칠게. 오늘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