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소설, 테니스코트 위의 연민

by 소설가 서기주

주간, 문학인신문, 2025년 10월 2일 (목) 통권 제 147호, 22, 23면.

짧은 소설, <테니스코트 위의 연민>


서 기 주 , 현대소설작가포럼 소설가


*


남자는 언제나 테니스코트에 들어설 때면 먼저 웃음을 지었다. 가볍게 허리를 숙이고,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 순간의 미소는 오래전 마음에 새긴 한마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웃 사랑은 미소와 인사입니다.”

본당 신부님이 자주 일러주던 가르침이었다. 남자는 그 말을 신앙의 문턱처럼 여겼다. 미소와 인사는 그의 하루를 여는 문이자, 세상과 마주하는 최소한의 예법이었다. 아무리 몸이 무겁고 마음이 흔들려도, 코트의 문을 열 때만큼은 잊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 단순한 마음을 늘 받아주지는 않았다. 인사를 받아주는 이는 있었으나, 고개를 돌려버리는 이도 있었다. 대꾸조차 하지 않는 태도. 무심히 지나쳐가는 발걸음. 남자의 웃음은 허공에 걸려 흔들리다가 서서히 지워졌다.


‘이 친구, 왜 이럴까.’

짧은 의문이 가슴에 맺혔다. 작은 바늘처럼 찔러대는 서운함. 목구멍이 타들듯 쓰라렸으나, 그는 곧 입술을 다물었다. 공연히 감정을 쏟아내면 자신이 더 초라해진다는 걸 알았다.


라켓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졌다. 네트를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공이 오고 가는 순간에는 불필요한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을 터였다. 스스로를 다잡듯 숨을 고르고, 다시 웃음을 띠려 했다.


그러나 웃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반복되는 외면에 조금씩 금이 가는 마음. 그는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다, 괜찮다. 네가 인사하는 건 누군가의 대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지 않느냐.


코트에 퍼지는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라켓 줄이 햇살에 번득였고, 신발 밑창은 시멘트 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남자는 그 속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웃음은 흐려졌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신부의 말씀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이웃 사랑은 미소와 인사에서 시작된다.



*


클럽의 어른들은 남자를 좋아했다. 미소를 먼저 건네고, 작은 일에도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고, 친절이 습관처럼 스며 있었다. 함께 코트에 서면 어른들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괜히 힘주어 부딪히지 않고, 실수가 있어도 탓하지 않았다. 그 너그러움이 사람들을 편하게 했다.


그러나 또래와 어린 회원들에게서 남자는 달리 보였다. 그는 누구에게나 존칭을 썼다. 나이가 어린 이에게도, 친구처럼 지내야 할 사람에게도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농담을 건네도 조심스러웠고, 속내를 털어놓는 일은 드물었다. 거리를 두는 태도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 같았다. 다가가려 하면 묘하게 밀려나는 기분.


"저 사람은 정이 없어."

누군가의 낮은 말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너무 깍듯해서 오히려 불편하다니까."

웃음 섞인 또 다른 말도 들렸다.


남자는 그 말들을 마음속에서 오래 씹었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걸까. 왜 그들은 내 예의를 부담스러워할까.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치의 세계가 떠올랐다. 거기는 싸움터였다. 적과 동지를 나누고, 상대를 꺾어야 내가 살아남는 정글.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힘겨루기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문화의 세계는 달랐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과 배려로 길을 내는 자리. 서로의 빛과 그림자를 어루만지며 함께 가는 길. 여유와 품격이 깃든 관계가 바로 문화였다.


남자는 코트에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라 여겼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그의 예의는 어떤 이에게는 존중이었지만, 다른 이에게는 거리감이었다. 스스로는 벽을 세운 적이 없다고 여겼으나, 상대 눈에는 장벽이 더 높아만 보였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겸손과 친절만으로는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구나.


남자의 가슴에 작은 서늘함이 번졌다. 미소는 여전히 입술에 걸려 있었으나, 그 속에는 연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상대의 불편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 그리고 벽 너머로 다가오지 못한 그들의 서운함까지 함께 느끼며.



*


어느 날, 코트에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 박사였다. 오래 보지 못했던 얼굴이라 남자는 반가움이 먼저 치밀었다. 오랜 세월 코트를 지켜온 사람, 늘 웃음으로 공기를 바꾸는 사람. 그의 등장만으로도 코트는 한결 가벼워졌다.


“사람 있는 데로 넘겨야 받지, 흐흐.”

볼을 건네며 그는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손 박사의 스트로크는 성실했다. 라켓 면이 공을 정확히 잡아 넘겼고. 볼은 상대에게 부드럽게 넘어겠다. 랠리는 오래 이어졌다. 게임에 리듬이 생기고, 땀방울이 번쩍이며 구슬처럼 흩어졌다. 남자는 그런 경기를 좋아했다. 이기고 지는 승부가 아니라, 서로 이어가며 만들어내는 호흡과 조화.


남자는 생각했다. 강력한 서브 한 방으로 끝내는 남성 선수 경기에는 어쩐지 허무함이 깃들어 있었다. 돈 주고 보기에 아까웠다. 그에 비해 여성 선수들의 경기는 달랐다. 끈기와 섬세함이 맞물리며 이어지는 랠리, 공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쏟아내는 진지함. 남자는 그런 장면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꼈다. 경기는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래 함께 호흡하며 버티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모든 경기가 손 박사처럼 즐거울 수는 없었다. 어떤 이는 작은 실수에도 버럭 짜증을 냈다. 볼을 놓치면 라켓을 탓했고, 파트너를 원망했다. 베이스라인에만 서서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서도, 파트너가 포칭을 하면 눈살을 찌푸렸다. 네트로 나서지 않는 자기 탓은 숨기고, 남의 움직임만 못마땅해했다.


그런 태도는 코트의 공기를 서서히 얼려버렸다. 누구도 크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는 모두 꺼렸다. 저 사람과는 함께하기 싫다. 그러나 동호회라는 이름 아래, 모임이라는 틀 안에서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


요즘 들어 남자는 자주 자신을 돌아보았다. 코트 위에서 공을 받아내는 순간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에서도, 거울 앞에서 셔츠 단추를 채울 때에도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남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사람인가. 나는 왜 그토록 무심했을까.’


남자는 평생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왔다. 젊은 날의 그는 늘 강직했고, 분명했다. 우직한 성격은 칭찬을 받았고, 성취를 낳았다. 그러나 힘이 빠지고, 어깨가 축 처지고, 숨이 차오르는 날들이 이어지자 남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눈치 없는 사람이었는지를.


사람은 누구나 아픔을 품고 산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울고, 겉으로는 당당해도 안으로는 부서진다. 남자는 이제야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초라하고 힘 빠지는 날을 맞이해 보았기 때문이다. 작은 계단을 오르며 숨이 차올라 가슴을 움켜쥘 때, 그는 알았다. 나도 약한 사람이다. 나는 강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강한 이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시샘한다. 힘 있고 잘나가는 이는 곧 공공의 적이 된다. 칭송은 짧고, 뒷담화는 길다. 남자는 그 씁쓸한 진리를 이제야 온몸으로 체감했다. 예전엔 몰랐다. 칭찬을 들으면 당연하다 여겼고, 시샘의 눈길은 무시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그들의 눈길 속에는 상처와 외로움이 숨어 있었다.


남자의 가슴에는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었다. 나는 남의 슬픔을 보려 하지 않았다. 나의 길만 바라보며 달렸구나. 그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또 다른 연민이 피어났다. 그들도 나와 같았구나. 나도 외롭고, 그들도 외롭다. 나도 쓰러지고, 그들도 쓰러진다.


늦게 깨달은 사실이었으나, 깨달음은 여전히 소중했다. 남자는 알았다. 이제는 강한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서툴게라도 눈을 마주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을.



*


그럼에도 남자는 세상을 밝게 보려 애썼다. 세상은 양지와 음지가 함께 흐른다. 그는 늘 밝은 쪽을 골라 바라보았고, 그 선택을 옳다 여겨왔다. 그러나 요즘 마음은 달라졌다. 밝음만 보는 눈으로는 사람이 다 보이지 않았다.


연민의 정. 남자는 그 말을 가만히 굴려보았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의 고통을 헤아리는 마음. 그 마음이 관계의 다른 출발점임을 알았다. 칭찬보다 먼저 건네야 할 숨소리, 위로보다 먼저 닿아야 할 눈짓.


물론 선은 지켜야 한다. 남의 상처를 함부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사생활은 각자의 울타리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서라도 알아차릴 수는 있다. ‘힘들겠구나.’ ‘외롭겠구나.’ 하고 먼저 느끼는 일. 그 작은 깨달음이 사람을 살릴 때가 있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더라도, 눈길 하나로도 건너갈 수 있는 강이 있다.


남자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그 눈을 지녔는가. 나는 그 강을 건너본 적이 있는가. 오래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배워야 한다. 빨리 달리는 법 대신, 함께 서서 기다리는 법을. 정답을 내미는 손 대신, 잠시 등받이가 되어주는 어깨를.


‘집기양단, 용중지어민.’

남자는 중용을 떠올렸다. 한쪽만 꽉 쥐지 말고 양쪽을 함께 안으라는 뜻. 밝음에만 취하지 말고 어둠도 함께 보라는 뜻. 그는 그 말을 오늘의 언어로 고쳐 적었다. 기쁨 곁에 슬픔을, 칭찬 곁에 모멸을, 힘 곁에 떨림을.


예수님이 사랑으로, 부처님이 자비로 세상을 보았다는 말은 멀리서 빛나는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의 코트에서 필요한 마음이었다. 실수를 덮어주는 미소, 지친 어깨에 살며시 얹는 손끝, 받아치지 못한 공을 함께 줍는 허리의 굽힘. 그것이 자비였고, 측은지심이었다.


남자는 결심했다. 밝음만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함께 끌어안는 사람이 되자고. 잘난 말보다 먼저 고개를 끄덕이고, 위로의 문장보다 먼저 숨을 맞추자고. 상대의 그림자를 내 그림자에 포개어 잠시 쉬게 하자고.


바람이 코트 위를 스쳐 갔다. 남자는 라켓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마음속에서도 무언가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사랑의 시작은 큰 약속이 아니었다. 작은 알아차림. 작은 연민. 작은 자비. 그 작은 것들이 서로에겐 넓은 그늘이 되었다.



*


코트 밖,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남자는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한 구름 사이로 햇살이 흩어졌다. 붉고 주홍이고 금빛인 노을이 층층이 번져 나갔다. 도시의 지붕들이 그 빛을 조금씩 나눠 가지는 동안, 코트의 바닥도 희미한 장밋빛을 품었다. 마음도 그 빛을 조금 얻었다. 가벼워졌다.


그때 코트 출입문에 그림자가 멈췄다. 인사에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 회원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손목에는 얇은 보호대가 감겨 있었다. 흰색 천이 팔목을 감싸 쥐는 모양이 어딘가 안쓰러웠다. 남자는 그제야 떠올랐다. 오늘 경기 내내 그는 넷 앞으로 잘 나서지 못했다.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리던 순간들이 있었다. 남자는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펴고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고 부드러웠다.


회원은 반걸음 멈칫하더니 시선을 들었다. 잠깐의 머뭇거림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눈가가 피곤에 젖어 있었지만 적의는 없었다. 숨 한 번 길게 내쉬는 사이, 둘 사이에 얇은 막 같은 것이 조금 걷혔다.


남자는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조용히 건넸다. 아팠구나. 몰랐구나. 오늘은 내가 먼저 기다릴게. 그 생각이 안쪽에서 미지근하게 번졌다. 몸이 먼저 아프면 마음은 금세 불편해진다. 말이 모나지고 표정이 굳는다. 그 또한 사람이었다. 노을빛처럼 빛과 그림자를 함께 지닌 존재였다.


남자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붉은빛은 더 깊어졌다. 구름 가장자리는 불씨처럼 타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루의 온기가 조금씩 저물었다. 그러나 저물어 가는 빛은 누군가에게는 쉬어갈 그늘이 된다. 그는 오늘 배운 마음을 또박또박 되뇌었다. 밝음 곁에 어둠을. 칭찬 곁에 모멸을. 힘 곁에 떨림을. 미소 곁에 연민을.


"괜찮습니다."

남자는 아주 작게,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나도, 당신도,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말을 끝내고 그는 입술에 느린 웃음을 올렸다. 이번 웃음은 재빠르지 않았다. 느려서 더 깊었다.


가방을 둘러메는 동작도 천천했다. 어깨끈이 피부에 닿는 감촉을 한 번 더 느꼈다. 라켓의 무게가 오늘의 무게였다. 무게가 있다는 것은 좋았다. 무엇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니까. 코트를 나서며 그는 네트를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얇은 줄이 퉁 울렸다. 하루의 마지막 인사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