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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클레어 Aug 30. 2024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 난 삼류

힘들 땐 그냥 울래요.

출산 후, 몸조리를 했는데도 예전의 몸상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 정도로 회복이 더딜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회복에만 온전히 전념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나에겐 나 말고 돌봐야 하는 생명체가 있었다.

회복에만 집중해도 예전의 절반으로 돌아올까 말까인데 육아까지 해야 했기에 너무 힘들었다.


정말 진짜 너무 힘들었다. 육아는 중노동이었다.

“밭 맬래? 아기 돌볼래?” 바로 밭을 매겠다고 대답한다는 그 말이 있지 않는가.

그 말이 왜 존재하는지 해보니 알게 됐다.  각오했는데 상상을 뛰어넘었다. 육아는 24시간 끝이 없는 노동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대가나 인정도 받지 못하는 그런 것이었다.

원래 자본주의에선 노동을 하면 돈으로 대가를 받는 게 정석인데 육아는 어떠한 것도 받지 못하는 제외적인 것이었다.

나를 갈아 넣는 노동 하는데 어떠한 대가가 없는 이 상황… 개억울 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특히 육. 아. 서.

할 말 많은 육아서. 육아서와 현실은 달랐다.

책에서 읽었던 ‘신생아의 백일의 기적’도 없었고, 책에 나온 아이의 발달과 내 아이의 발달 과정은 정말 달랐다.

난 육아서를 읽었을 뿐인데 소설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

책은 평균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평균이 문제였다.

책이 내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으니 현타가 세게 왔다.

책의 이론과 내 아이의 발달이 다를 때 엄마들이 느끼는 감정은… 불안과 공포다.

불안과 공포를 안고 ‘혹시 내 아이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매일 의심했고, 괜한 죄책감이 옥죄어왔다. (과거나 현재나 굉장히 평균의 아이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기에게 있던 낯가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24시간 내 곁에 붙어있는데 낯가림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부족한 나를 믿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아기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신생아는 낮과 밤이 없었다.  

조금씩 자주 먹었고 자주 자다가 깼으며 많이 싸고 많이 울었다.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변수도 많았다.

갑자기 이유 없이 악을 지르며 울 때도 있었고 이유 없이 밤잠을 자지 않았다.

고문 중에 가장 끔찍한 고문이 잠을 재우지 않는 거라고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엔 ‘나 밤샘 잘하는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자의적 밤샘과 타의적 밤샘의 강도가 다르다는 걸 몰랐다.

고통의 강도가 정말 다르다.

자의적 밤샘은 결정권이 나에게 있지만 타의적 밤샘은 결정권이 나에게 없다.

나는 오직 타인을 위해 결정권 역시 타인에게 있다. (타인=아기)

‘자아가 있는데 자아가 없었고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존재했다.


그리고 몇 달을 타의적 밤샘을 하다 보면 ‘이러다 미치는구나’를 겪게 된다.

나도 ‘이러다 미치겠구나’ 구간이 찾아왔고, 정신이 피폐해졌고 자유도 없으니 답답했고 그나마 1% 있던 생기도 잃었다.

‘육아하다 미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없다면 육아하다 미친 1호는 내가 될 것 같았다.

갑자기 눈물이 터졌고 또 괜찮아졌다. 화가 솟구쳤다가 웃었다.

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나 본다면 “미친년”이라고 말할 것 같았다.

자고 싶었고 쉬고 싶었고 자아를 되찾고 싶었고 무엇보다 호르몬이 매일 난동을 부렸다.

놀아나고 싶지 않았는데 난 그 농간에 마구 놀아났다.


이런 날 제일 우울하게 만든 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육아의 고통을 공감해주지 않았다.

사람은 먹고 싸고 자는 당연한 행위를 하는 것처럼 육아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육아)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이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육아를 해본 선배들도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했으니, 이 상황을 공감받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웃고 넘길 일도 그땐 다 화가 났고 억울했다.


공감받을 수 없는 노동은 끔찍하다.

외톨이가 된 기분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엿같은 일이 있으면 친구들과 욕하면서 풀 수 있지만, 육아가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공감받을 수 없는 현실.  

저출산이라고 뉴스에서 떠들어대면서 육아를 시작하는 여성들은 깡그리 무시하는 태도에 화가 났다.

그 시기엔 부족한 잠 때문인지 약한 아기를 24시간 보호하느라 예민했던 건지 모든 것에 예민했고 화가 났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데 원인 제공자에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원인 제공자이지만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아기였다.

당근과 채찍을 쉴 새 없이 던져주는 무한반복의 굴레가 이어졌다.

너무 힘들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때마다 아기는 웃어줬고, 그 웃음을 보고 있으면 행복했다.

그러다 우울했고 또다시 웃었다.

그리고 이 무한굴레에 갇히면서 깨달은 건 아기에게 온 우주는 엄마라는 것이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있으니 책임감이 커졌다.

내 몸 어딘가에서 ‘책임감 장착”이라고 중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강한 책임감만큼 걱정이 많았고 점점 우울했다.

웃다가 울다가, 화내다가 죄책감을 느끼다가 다시 울다가 행복한…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라고 말하지만,

난 힘들 때 엉엉 울다 웃는 삼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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