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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렌디피티 Oct 04. 2022

시어머님께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더니...

'힘내라는 말', 그 잔인함에 대하여.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 그래도 한 번쯤은 시어머님께도 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모르지만, 만약 사직(의원면직)을 하게 된다면, 시어른께 이 결론만 툭 던져놓기에는 그분들이 너무 갑작스럽고 많이 놀라실 것 같아서이다.

내 심정 전부를 헤아려주시기까진 바라지 않아도 이런 과정을 엿보이는 것 자체가 어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의'이자, 갑작스러운 비보(?)를 전해드리기 전 실시하는 '예방주사'라고 생각했다.

어머님께 통화버튼을 누르고, 일상생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중 고이고이 준비한 회사 이야기를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냈다.

"어머님, 저... 회사 말이에요......"

" 어, 왜 어멈아."

"그게.... 저 여태껏 정말 많이 고민하고, 힘들게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제가 그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휴직도 많이 했고 그런데, 그게 꼭 애들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사실 제가 회사에 가면 너무 숨이 막히고 견디기 힘들어서 애들 핑계로 도망쳐 있었어요, 제가 계속 이 회사에 다니면 좋은데 저 이 일 더 하다가는 아이들  옆에서 오래 못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저 좀 이해해 주세요 어머님."

"에고 그랬구나..."

(휴... 다행? 어머님이 내 심정을 조금 헤아리시려는 듯?!, 역시 우리 어머님은 날 이해하기로 하신 거야. 그런 거야.)

"00야, 넌 할 수 있어! 지금 이쪽 지역에서 근무하기 어려웠다면 일단, 네가 이사 간 지역으로 전근 신청을 해봐. 환경이 바뀌면 또 달라질 거야. 네가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자라서 사람들 등쌀이 더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난 자매 많은 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내 것'도 지킬 줄 알고 누군가랑 싸우는 것도 당연한 일상이었는데,,, 넌 아마 그게 어려워서 그랬을 거야...."

뚜둥..... (이런 타이밍에 내가 무남독녀인걸 누군가 일깨워 주는 게 사실,,, 달갑진 않다..)

이런 말씀 들으려고 어렵게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그게.

어렵게 풀어놓은 보따리를 다 풀어 보이지도 못하고 다시 주섬주섬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이때부터였나?

뭔가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힘내라'라는 말씀을 듣고 있는데 오히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통화하며 기대어 앉아있던 아이의 침대가 씽크홀처럼 나를 저... 아래까지 쭈~욱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머님은 계속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난, '이제 공무원 그만하고 싶다'라고 말씀드린 건데

어머님께서 해주신 좋은 말씀의 전체적인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할 수 있다!'였다,

어디서?

'공직사회'에서

무엇을?

'그 좋다는 공무원을'

언제까지?

'정년'까지...... 쭈~~~ 욱.

예상 밖의 전개에 피로감이 밀려와 도저히 통화를 이어나가기 힘들었지만, 끝까지 '웃으며' 응대를 했다.

또 나의 '주특기'가 나왔다. 웃는 것.. 내가 아무리 기분이 별로여도 몸 상태가 노답이어도 그저 웃는 것... 말이다. 드디어 어머님의 말씀에도 끝이 보였고, 내가 활짝 웃으며

"어머님, 그럼 저녁 식사도 맛나게 하세요! 호호 홍." 하자,

"00야 잠깐만!"

" 굳이 그렇게 웃을 필요가 없어, 사람들이 그렇게 웃으면 너를 쉽게 봐, 그래서 네가 회사에서 더 힘든 거야..."

"......"

통화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결혼한 지 10여 년의 세월을 지내오며 어머님과 갈등으로 혼자 속 썩이는 때가 많았지만, 몇 년 전 어머님과 케케묵은 감정을 대화로 푸는 극적인 시간을 갖은 뒤, 어머님이 좋은 쪽으로 변하셨으니 이런 나의 상황까지도 이해해 주실 수 있을 거란 희망을 잠시 가졌던 것 같다.

그 희망은 오랜 시간 불편함을 참고, 묵묵히 견뎌왔던 나에게 주어진 '기다림과 인내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힘내서' 회사생활 계속 잘해보라는 응원의 선물을 받아버린 나는, 오히려 '힘이 더 빠지는' 이  아이러니함을 더 이상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어머님도 아마 시간이 필요하신 거겠지....'라고 생각을 하기로 했다.

너무 당황스러우셨을 테니까.

또한 나를 이해해 주시려고 노력해주시는 걸  아니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그래도 진도는 좀 나갔잖아?

그렇지만 내가 힘을 내서 물을 주고 싶은 화분은 '회사에서 잘해보자' 화분이 아닌, 회사를 벗어날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는 화분' 임을 분명히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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