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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렌디피티 Oct 05. 2022

아무리 못해도 '장관'쯤은 됐어야 할 울 엄마의 교육열

하늘에 계시는 엄마에게 '공무원 그만둔다'고  말하기

이달 학습, 다달 학습, 완전학습.

매달 초면 문구점에서 따끈따끈한 신간이 나왔다. 바로 문제집 3형제다.

엄마는 빠짐없이 그것들을 사다 날랐고 나는 전투적인 자세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해치웠다.

풀다 보면 똑같은 문제들이 많아서 거의 외우다시피 공부하니 당시 초등학교 정도의 시험에서는 줄곧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름 모를 시험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당장 시험이 다음 날인데 공부를 끝마치지 못한 9살 아이는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꾸벅꾸벅 졸며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할 일이 태산인데 정신을 못 차리는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보다 못한 엄마는,

"잠깐 기다려 봐." 하시더니,

색이 바랜 작은 하늘색 바가지에 물을 퍼 오셨다.

그 안에는 '물' 뿐이 아니라, '얼음' 몇 개가 영문도 모른 체 둥둥 떠있었다.

"여기다 발 담가!"

엄마의 불호령에 당황함도 잠시, 잽싸게 작은 발을 밀어 넣아야만 했다.


"으 차거."

몸을 부들거리며 오싹한 냉기에 들고 있던 연필을 꼭 움켜쥐었다.

얼음고문(?)으로 호되게 정신 차린 차린 어린아이는, 문제집을 다 푸는데 끝내 성공했다.

반쯤 감은 눈을 하고 좀비처럼 비실비실 침대로 걸어가 시체처럼 뻗어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북극 한가운데에서 얼음을 잔뜩 입 속에 쑤셔 넣고 있는 꿈을 꿨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키우고 가르친 내가, '9급 공무원'이 되어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업무를 보다가 '내가 어떻게 지금 여기 앉아 있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때 전공과도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어릴 때 단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던 직업을 가지고 첫 발령을 받아 업무를 보고 있는 나의 일상이 그날따라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계장님, 저희 엄마가 저한테 쏟아부은 교육열을 생각한다면 저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지금쯤 못해도 장관 정도는 했어야 했을걸요? 제가 어려서부터 공부한다고 잠을 푹 자본 적이 없어요, 티브이도 맘 편하게 본 적이 없이 살았는데..."

9급 공무원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다만 엄마의 지독한 교육열을 떠올려 보니 문득 든 생각이었다.

유난히 나의 농담을 좋아해 주셨던 계장님은 내 실없는 농담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셨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을 때, 제일 마음에 걸렸던 사람은 '하늘에 계신 나의 엄마'였다.

차라리 엄마가 살아계시면, 나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엄마를 차분하게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나는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너 절대 회사는 그만두지 마라, 요즘 세상엔 여자도 직업이 있어야 해! 니 직업이 얼마나 좋냐, 난 아직도 네가 공무원교육원에 들어갈 때 그 벅찬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2014년 6월에 내가 들은 이 말은, 그 해 8월에 돌아가신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사실, 그래서 더욱 공무원을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내가 가장 사랑한 엄마의 유언을 어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버티고 버틴 13여 년...


'엄마, 엄마가 내게 쏟은 열정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엄마의 유언을 따를 수 없을 것 같아...... 엄마가 절대 회사는 그만두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엄마는 이런 내 맘 이해해줄 거지?'

하늘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서 아주 작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한 재주를 가지고 있을 거라 믿고 차근차근 내 마음을 속삭이듯 전했다.

다행히 이렇게 속으로 내 뜻을 전한 후 몇 달째 한 번도 엄마가 노발대발하시는 꿈같은 건 꾸지 못했다.

오히려 엄마는 항상 내 꿈속에선 웃는 모습이었다.

이런 나를 말리려고 했으면 꿈에라도 찾아와 안달복달했을 것 같은데...


'나 그럼, 이제 그만해도 괜찮은 거죠?'

'딴 말하기 없기야~!'


엄마한테 어렵사리 그만둬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다(?)


자 그럼, 이제 다음 차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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