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랍고 뭉클한 할머니의 미역국
딸과 함께 떠나는 미각여행 속으로
"엄마, 배 아파." 학교에 다녀온 딸아이가 칭얼댄다.
아이를 달래고 침대에 눕히고 잠을 재우려는데,
"나 미역국 먹고 싶어."라고 말한 후 아이는 금세 잠에 빠져든다.
배가 아파도 미역국을 제일 먼저 찾을 만큼, 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미역국, 그것도 무려 엄마인 내가 끓여주는 '엄마표 미역국'이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멸치와 다시마 육수를 푹 우려낸 뒤, 해동한 국거리 소고기와 통마늘을 넣고 다시 한번 푹 끓여낸다. 잘 우려낸 육수는 간을 하지 않아도 '단 맛'이 난다. 팔팔 끓어오르는 육수를 한 숟갈 입에 넣자, 이미 마중 나와있던 '달큰한 맛'이 나를 반긴다. 미리 불려놓은 미역을 손질하여 소담지게 냄비에 담아내고 천일염과 간장으로 밑간을 한 후 은근한 불로 오랫동안 우려낸다. 냄비 뚜껑을 열자마자 와닿는 미역국 향기는 더 이상 맛을 보지 않아도 맛 내기에 성공했음을 귀띔해준다. 은근한 불로 끓이며 여운을 즐기다가 마침내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이고 잠자는 딸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평화의 비둘기가 딸아이의 자는 모습에 어우러져 있다. 딸이 가장 좋아하는 미역국을 가장 맛있게 끓여낸 여유를 음미하며 은근히 끓어 맛을 내는 미역국처럼 딸아이가 잠에서 깨어나길 가만가만 기다려본다. 아이가 눈을 떴다.
“딸, 엄마가 미역국을 기가 막히게 끓여놨어, 우리 밥 먹자.” 예상과는 달리 딸아이는 칭얼댄다.
“엄마, 나 배가 계속 아파.”
아이의 배에 손을 올리고 동그랗게 원을 그린다. 아이는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금 잠에 빠져든다. 아이가 안정을 찾는 동안 노곤함에 못 이긴 나의 눈도 스르르 감긴다.
아이가 나를 부른다.
“엄마, 배고파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미역국을 준비해 놓았으니 의기양양하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양의 국물과 아이의 속살같이 보들보들한 미역만을 골라 국그릇에 담아낸다. 갓 지은 뜨끈뜨끈한 밥을 국에 말아 아이의 입에 한 숟갈 집어넣는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이 맛있을 때 아이는 보통 한 번의 감탄사를 내뱉는데, 이번엔 무려 두 번의 감탄사를 연발한다. “음~ 음~~.” 예상대로 ‘대성공’이다.
"엄마 짱!"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미역국 향에 취해 식사시간이 돌아오기도 전에 나도 한 대접 퍼서 아이와 함께 후루룩 짭짭 뜨끈함을 즐긴다. 국을 좋아하는 나와 똑 닮은 내 딸과 함께하는 행복한 '국밥 즐기기 시간'이다.
미역국을 먹다 보니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시골 부뚜막 가마솥에 한 솥씩 끓여놓으시던 미역국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의 미역국은 유난히 깊은 맛이 났다. 친정엄마가 끓인 미역국과는 그 깊이와 내공이 달랐다. 그런데 오늘 내가 끓인 미역국에서 그 내공과 연륜이 느껴지는 반가운 맛이 난다.
그 순간 나는, 살이 여리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음식은 나를 데리고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나를 유독 예뻐하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아른거린다.
딸아이는 할머니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미역국 한 그릇’으로 나의 딸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골 외갓집 부엌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같이 부뚜막에 나란히 앉아 호호 김을 불며 머리를 맞대고 미역국을 먹는다.
15년 전 외할머니가 끓여준 '그 미역국'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