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어김없이 넷플릭스를 보며 의미없는 스크롤 내리기를 반복하다 다큐멘터리를 선택했다.
생산성에 목 매는 인간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수도...?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후기를 남긴다.
1. 제목
딜레마의 사전적 정의는 '두 개의 판단 사이에 끼어 어느 쪽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즉, 이 다큐에서는 소셜 미디어(sns)의 양면성을 이야기 한다. sns의 유토피아적인 측면은 우리 모두에게 명확하다. 정보 빠른 순환, 짧은 시간안에 정보의 생산과 전달 뿐만 아니라 재가공이 가능한다. 덕분에 우리는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를 빠르게 접할 수 있으며 인적 네트워크 또한 끈끈하게 연결되었다. 삶의 질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것이다. 그렇다면 sns의 디스토피아적인 측면은 무엇일까? 난 인적 네트워크의 범위가 지역, 학교에서 전세계로 확장됨에 따라 타인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는, 그 결과로 한 개인을 타인 지향적인 삶을 살면서 우울감,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라 예측했다. 자아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10대(어쩌면 20대도)들에게 sns 위험성을 강조하는 기사들이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의 고위 관리자들은 이보다 더 무서운 디스토피아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창조물을 조심하라 경고한다. 한 개인을 우울에 빠뜨리는 것보다 위험한게 도대체 무엇일까?
2. SNS의 좀비
핸드폰이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는 사실은 종종 재미거리가 된다. '와 진짜 듣고 있나봐?!!'라는 생각은 단순 신기함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게시물을 봤는지, 어떤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고 댓글을 달았는지, 얼마의 시간동안 그 게시물을 봤는지, 하물며 스크롤을 몇번이나 내렸는지 등의 모든 활동들이 추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섬뜩해진다. SNS 회사의 이윤구조는 광고주에 의해 결정된다. 유튜버와 아주 비슷하다. 유튜버는 자신의 영상에 광고를 삽입해 수익을 얻는다. 조회수로 인한 수익보다는 광고를 통한 수익이 훨씬 크다고 알고 있다. SNS 회사들은 다른 기업체로부터 광고를 받는다. 광고를 많은 사람이 볼 수 록 이윤은 증가한다. 따라서 SNS 기업의 목표는 이용자수를 늘리고 늘어난 이용자 수의 앱 사용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업이 채택한 비지니스 모델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다큐에서는 그 모델은 위와 같은 장면으로 시각화 했다. 빨간 박스 안에 갇힌 사람은 우리의 뇌를 상징한다. 빨간 박스 맞은편에 선 3명의 사람은 인공지능이다. 현재 우리는 인스타그램의 계정을 가진 사람이라 가정해보자. 우리는 자신이 스마트폰 중독임을 알게되고 하루만이라도 SNS 이용량을 줄이고자 마음 먹은 상태이다. 자, 이때 우리의 인공지능은 어떻게 우리를 다시 중독의 늪으로 빠뜨리는가를 알아볼 차례이다. 핸드폰은 덮어논지 1시간 째, 알림이 울린다. "당신이 알수도 있는 사람이 새로운 계정을 개설했어요! 그 사람을 어서 환영해주세요!" 안타깝지만 새로운 사람을 기꺼이 팔벌려 환영해줄 만큼 대한민국의 사회는 말랑하지 않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포기하지 않지....또 다시 알림이 울린다. "누구누구가 오랜만에 스토리를 올렸어요!","누구누구가 오랜만에 게시글을 올렸어요!","누구누구가 회원님이 관심가질 만한 콘텐츠를 올렸어요!","누구누구가 좋아요를 눌렀어요!"등등등 결국 우리는 인공지능이 만들어 놓은 시나리오에 다시 빠져든다. 습관적으로 어플을 키고 좀비처럼 스크롤을 내린다. 이 다큐에서 묘사된 빨간 박스 안의 사람은 인공지능의 뜻대로 멍한 동공을 콘텐츠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다. 참 흥미로운 관점이다.
3. 심각한문제
여기서 의문점이 생길 수 있다. 정보를 추적해서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알고리즘으로 띄어주는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닌가? 굳이 검색할 필요 없이 내가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는 다면 효율적인 측면에서 아주 굿이다 이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내가 SNS에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해 오직 내가 필요로 하고 관심있는 정보만 제공한다는것. 낙태 찬반 토론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정보를 찾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당신이 찬성의 입장에서 정보를 찾는다면 순식간에 피드들은 여성의 권리, 낙태가 합법인 나라의 사례들, 원치 않는 임신등의 콘텐츠들도 도배가 될것이다. 심지어 구글 검색창에 낙태라고 썼을때 조차 낙태의 장점, 낙태 찬성, 낙태 합법등등이 자동완성으로 당신의 클릭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반대 근거들은 우리가 직접 나서서 찾아보지 않는 한 절대로 접근할 수 없다. 우주의 음모론이란 평평한 지구론, 지구 멸망설을 믿는 이들을 쉽게 비웃을 수가 없게 됐다. 그들의 피드가 그들이 보는 세상이 것이며 그 피드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이렇게 우리의 자아를 조금씩 조작해간다. 특히 이 피드들이 정치를 기준으로 분극화 된다면 사태는 심각해질 것이다. 누군가의 피드는 우파의 의견이 가득할 것이며 누군가의 피드는 좌파의 의견이 가득할것이다. 이러한 분극화는 사람들의 소통을 줄인다. 시야를 좁히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멍청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 내전이 발생한다. 실제 사례도 그득하다. 대표적으로 미얀마에서 일어난 군부대 쿠데타이다. 미얀마에서는 인터넷이라고 하면 페이스북을 떠올릴만큼 거의 모든 사람이 인터넷 플램폼으로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미얀마는 두 민족의 피로 얼룩진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을 이용해 두 민족 간의 적대심에 불을 지폈고 서로를 향한 비난과 욕설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리고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지난 미국대선에서 푸틴은 총칼없이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고 투표율 조작 또한가능했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협한다면 우리의 직업을 대체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인공지능은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구글이라는 회사의 지하에 놓인 수십억개의 컴퓨터 중에 한개이며 정보를 빨리며 조종당하고 있다. 마치 뇌의 뉴런처럼 말이다. 우리는 상품으로써 판매되고 있고 그 고객은 광고주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sns 기업들이 초기에 의도했던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sns 기업에 데이터 수집과 관리와 관련된 법을 제정해 제제를 가하는 것이다. 아동 성착취 시장을 불법으로 금지하고 마약 시장을 금하듯 데이터 수집 시장에서 제제가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기업의 이익 구조와 상충한다. 데이터 수집에 제한을 둔다는 것은 이용자 사용 시간을 줄이라는 의미와 같다. 그렇다면 광고의 노출 빈도가 낮아지고 이윤은 줄어들어 sns 기업은 망하게 된다. 또 다른 딜레마를 마주한 것이다.
4. 해결
전문가들은 편향된 정보에 빠져 자신의 자아를 뺏기지 말것을 경고한다. sns는 이미 우리의 삶과 불가분 할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우리의 자아를 지키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의무가 있다. 우리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가장 쉬운방법은 우리와 반대 의견을 가진 계정을 팔로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종당하는 좀비로부터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터를 추적하지 않는 사이트를 이용하자. 다만 이는 아주 어려울것으로 여겨진다. 사이트의 생명은 데이터 수집인데 이를 허용할 바보 ceo가 있을지 미지수이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에 빠져산다. 이 정보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파악할 시간도 없이 다른 정보가 주어진다. 웃긴건 sns 관리자들 조차 이 정보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전부 인공지능이 하는 짓인데 그들이 알리가 있나. 그렇게 모든 사람은 기술에서 방관자가 된다. 그 누구도 관리할수 없고 그저 바라만 본다. 다큐를 보면서는 긴가민가 했다. 이렇게까지 과민하게 반응할 일인가 싶기도 했고 혹시 이 다큐도 거짓정보인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정리가 됐다. 이 다큐가 거짓정보 아니야?라고 의심하게 만드는게 이 다큐의 목적이 아니었을까하고. 내가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단 한번도 이 정보가 거짓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다큐를 봄으로써 처음으로 의심할수 있었고 콘텐츠를 소비하며 스스로에게 선택의 자율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셜 딜레마 라는 이 다큐는 성공한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