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때는 1960년대. 미국의 정찰용 인공위성이 중국 남부 푸젠성 남서부 산속에서 핵미사일 기지로 의심되는 구조물들을 발견한다. 원형과 사각형 모양으로 누가 봐도 미사일 격납고처럼 생겼다. 이것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 그러나 후에 알려진 이 건축물의 정체는 보통 사람들의 공동주택, 고대 아파트 토루(土樓, 土楼)였다. 덕분에 토루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토루에 대해 이것만큼 효과적인 노이즈 마케팅이 또 있을까?
푸젠성 토루의 위치. 출처:네이버 OpenStreetMap
*《세상에서 가장 큰 중국 책 CHINA》를 선물 받았다. 퇴임하는 선배가 책상 정리하면서 건넨 책이다. 사진책은 아니지만 초대형 사진을 중심으로 중국 역사와 문화, 자연을 망라한 중국 개념서였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유려한 사진의 연속이라 내내 감탄하면서 보았다. 책을 다 덮고 났을 때 잔상처럼 눈에 밟히는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나와 토루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민안치&크리스토퍼 필리치외, 디자인하우스)
내 머릿속에 강렬한 기억 눈금을 그은 토루를 이제야 찾아가는구나. 토루가 가장 많은 곳은 푸젠성. 유네스코에 등재된 토루만도 46개나 된다. 샤먼에서 출발해 1박2일간 토루를 둘러볼 계획을 짰다. 융딩(永定)현의 초계토루군(初溪土楼群)을 먼저 보고 샤먼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징(南靖)현의 전라갱토루군(田螺坑土楼群)을 보는 일정이었다. 샤먼에서 융딩현 시아양(下洋)까지 버스로 4시간이 걸렸고 거기서 토루 마을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야 했다.
초계토루군. 왼쪽부터 여경루, 경경루, 집경루
초계토루군은 5개의 원형 토루와 10여 개의 사각 토루가 모여있는 동네다. 원형 토루인 여경루, 경경루, 집경루에 이어 사각 토루 번경루를 둘러봤다. 하나의 토루는 같은 성씨의 집성촌이다. 토루의 외양은 외부 침략을 막기 위한 특수 건물로 보였다.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방어 목적으로 냈을법한 작은 창문이 흙벽 높게 나있었고 입구도 대문 하나뿐이다. 유사시에 대문만 걸어 잠그면 그 자체가 완벽한 요새로 변신하는 구조다.
토루에 들어서니 가운데 마당이 있었다. 우물을 가진 마당은 공동공간으로 쓰이고 외곽으로 둥글게 지어올린 하나의 통건물은 공간을 분할해 수십 가구가 거주한다. 하나의 토루에 적게는 200명, 많게는 900명까지 살았다고 한다. 1층은 부엌, 2층은 창고, 3층과 4층은 생활공간인 방으로 되어 있다. 수직 방향 1~4층이 한 가구가 된다. 방의 크기와 구조가 균일한 것으로 보아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살림살이도 평등했으리가 짐작되었다.
융딩현에서 가장 오래된 집경루(1419년 명나라때 건설, 700년의 역사), 현재는 토루 박물관으로 운영
복도식 원형 아파트다. 프라이버시는 없다. 그러나 안전하고 편리하다.
집경루를 포함한 초계토루군은 서씨 집성촌이다. 토루 1층의 조상을 모신 곳.
내가 간 날, 경경루에서 마침 결혼식이 있었다. 마당 안 뜰에 붉은색 차양을 드리우고 하객들이 결혼 피로연 중이었다. 경경루 3층을 둘러보다가 신랑 신부의 신혼방도 발견했다. 열려있길래 남의 신방도 살짝 훔쳐보았다. 신방의 장식도 붉은색 일색이다. 결혼 축의금도 붉은색 봉투에 넣어 건네는 '홍빠오'라고 하니 중국의 결혼식은 붉은색에서 시작해 붉은색으로 끝나는 붉은색 잔치였다.
경경루 안뜰에서 벌어진 결혼 잔치
200명은 족히 될 것 같은 하객들. 토루 안뜰의 중요한 쓰임새는 큰 행사장.
붉은 색으로 장식물로 꾸며놓은 신랑신부의 신방
오후에 전라갱토루로 이동해서 토루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방에 욕실이 딸려 있어 신기했다. 마치 우리 전통 한옥의 온돌방 안에 욕실을 만들어 넣은 것과 같은 셈이다. 다음날 사채일탕(반찬 네가지와 국 한 그릇)부터 먼저 둘러보았다. 4개의 원형 토루와 1개의 사각 토루에 대한 애칭이다.
난징현 토루군의 인기 토루 4채1탕 즉 4개의 원형토루와 1개의 사각토루
토루 건축은 초창기 장방형이나 정방형 토루에서 점차 원형 토루로 발전해갔다고 한다. 원은 일정한 길이일 때 최대 넓이를 만들 수 있는 도형이다. 따라서 원형 토루는 사각 토루보다 버려지는 공간이 없어 공간 활용에 효과적일 뿐 아니라 흙과 자갈, 짚, 나무, 찹쌀, 설탕 등의 건축 재료도 절감된다. 지진에 강하고 태풍과 같은 강풍에도 더 잘 견딘다고 한다. 높은 흙벽과 4층 구조는 방어 기능을 갖추면서 동시에 평지가 좁은 산악 지대에서 땅을 최대한 활용하는 공법이다. 개방적 원형 구조는 채광과 통풍에 유리할 뿐 아니라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데 적합한 취락구조다.
토루에서 하룻밤
유창루 마당 한가운데 서서 360도 고개를 돌리며 토루를 관찰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밖에서는 신비감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안에서는 사람살이의 생명력에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건축물이다. 누가 이런 구조물을 지어 집단생활을 했을까?
난징현의 토루 중 가장 오래된 700년된 유창루. 집집마다 1층에 작은 우물이 있다.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전시에 대비한 공동생활시스템을 만들어 상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토루의 주인이었다. 중국의 한족의 한 지류인 객가인(客家人)이 그들이다. 객가인은 이름 그대로 ‘손님인 사람들’이다. 전쟁을 피해, 민란을 피해, 가뭄과 기근의 생활고를 피해 원래 근거지 중원을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깊고 험한 산속에서 자신들을 지키며 살기 위해 건설한 집이 토루였다. 토루는 이주민으로 뭉쳐야 했던 공동체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식당과 기념품 가게를 포함한 토루
토루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집이다. 많은 객가인들이 지금도 토루에서 살고 있다. 오래된 토루는 그 자체가 토루 박물관이 된 곳도 있고 일부가 관광객 대상 상점으로 변형되기도 했지만 토루는 객가인이 처음 토루를 짓던 그날 이후 지금까지 주거의 본질을 잃은 적이 없다.
다진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한 소시지가 건조되고 있는 토루 발코니
요새이면서 동시에 보통사람들의 공동 살림집인 원형 토루는 예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에서 표현한 '둥근 하늘' 즉 그들의 이상을 땅에 구현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을 빌자면 ‘태양이 있는 곳에 중국인이 있고 중국인이 있는 곳에 객가인이 있다.’ 중원을 떠나 푸젠에 외지인으로 정착했고, 현대에 와서는 다시 푸젠을 떠나 동남아와 전 세계에 뻗어나가서도 강한 결속력으로 살고 있는 객가인들에게, 토루는 집이요, 고향이요, 성(城)이요, 국가이며 소우주(小宇宙)다.
전라갱에 이어 유창루와 탑하촌을 들렀다가 난징토루군 입구로 돌아와 샤먼행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예정 시각을 1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중국 할아버지가 버스 오는 걸 대신 봐준다며 수시로 도로 끝을 내다보면서 같이 기다려주었다. 끝내 버스가 오지 않자 이리저리 알아보더니 정차 중인 대형버스 앞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것 실화? 샤먼 가는 단체 관광버스에 태워준 것이었다.
버스에 타고 보니 승객은 하얼빈에서 온 중국 단체관광객이었다. 옆자리 승객 말로는 하얼빈에서 출발해 10일간 샤먼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공짜 버스를 얻어타고 3시간 길을 달려 샤먼으로 돌아왔다. 홀연히 나타나 결정적인 도움을 준 나의 홍반장 중국 할아버지에게 고마움을 표할 길이 없지만 내겐 '또 한 사람의 고마운 중국인'이 추가되었다.
여행은 뭔가를 보기 위해 떠난다. 대상은 주로 대자연의 풍광이거나 건축물이다. 후자에는 화려한 왕궁과 웅장한 성당, 고대의 신비스러운 제단이나 무덤 등이 속한다. 그 중 유명세와 비싼 입장료 값을 했던 건축물로서 알함브라 궁전,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앙코르와트 등이 떠오른다.
내게 이들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준 건축물이 '푸젠성의 토루'였다. 외부는 폐쇄적이고 내부는 개방적인, 공동 요새이면서 공동 주택인 곳, 700년 넘도록 지금도 '보통 사람들의 사람살이'를 담아내고 있어 더 감동적이다. 여기에 도움받은 중국 할아버지의 기억까지 덧새겨져 토루는 내내 잊지 못할 여행지로 남을 것이다.
※ 토루의 환생인가? 토루와 똑같이 생긴 현대식 건물이 있어 깜짝 놀랐다. 2005년에 지어진 코펜하겐 남부 외레순드 지역의 티에트겐(Tietgen) 기숙사. 《죽기전에 꼭 봐야할 세계 건축 1001》(2009, 마크어빙외, 마로니에북스)에 소개되었다. 중국의 토루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되었다고 한다.
코펜하겐 대학의 티에트겐(Tietgen) 기숙사. 7층의 원형 건물( 사진 출처: flickr.com)
기숙사 안쪽 뜰 (사진 출처 : Bunkums on WordPress.com)
360명의 학생이 머물 수 있는 기숙사. 안뜰과 접하는 곳에 공동 공간인 학습실과 주방을 배치하고 바깥쪽 방향으로 개인 방을 배치해서 '따로 또 같이'의 응집력과 생동감을 담았다고 한다. 몇개 방은 한때 게스트하우스로도 운영했는지 호텔 중개사이트가 검색되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