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부로 한달짜리 제주 입도인이 되었다. 남들이 그렇게나 한다던, 내가 그렇게나 부러워했던 '제주 한달살기 대열'에 나도 드디어 합류했다. 여수항에서 배에 차 싣고 한밤 자고 나니 제주항이다. 물리적으론 내가 내 차를 데리고 물을 건너온 것 뿐이다. 뭐든 막상 하고 나니 어려울 것 하나 없다. 다들 로망만 갖지 말고 그냥 저질렀으면 좋겠다. 나처럼.
여수항에서 새벽 1시에 출발한 한일골드스텔라호가 사람과 차를 제주항에 7시에 데려다주었다.
오리엔테이션 1. 숙소 주인이 안내한 제주속살 여행
제주 입도 이틀쨋날, 숙소 주인 내외가 제주 여행 오리엔테이션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숙소가 있는구좌의 덜 알려진 오름을 소개해준다고 했다. 일행은 여섯. 70대 주인 내외, 숙소의 본채에 머무는 60대 부부, 별채에 묵는 우리 50대와 60대, 이렇게 해서 연식이 좀 있는, 호스트와 게스트 조합 세 팀이 한 차를 타고 반나절 투어를 나섰다. 세화읍내 슈퍼마켓 3개와 약국, 병원, 은행 등의 위치를 차로 천천히 지나면서 알려주신 뒤, 주변 식당과 메뉴를 추천해주셨다.
현지인이 알려주는 구좌의 숨은 여행지라? 바깥사장님은 손수 운전에 가이드요, 안사장님은 조수와 일정 담당이다. '하도하구 - 청산불턱 - 고망난 돌불턱 - 송당초교 - 송당마을 - 당오름 - 도댓불'을 다녀왔다. 하도는 내가 좋아하는 습지와 바다가 만난 곳이고 자연 불턱 두곳에서는 이번 제주 여행에 영감(?)을 얻었다.
하도리 습지(왼) & 당오름 삼나무 숲길(오)
고사리밭에서 고사리 따기 체험도 잠깐...
숙소 바깥사장님은 여행지 소개하시느라 신이 나셨고, 안사장님은 본인의 관심사인 꽃이름을 알려주신다고 바빴다.주인 내외분도 오늘만큼은 평소 하시던집 관리와 텃밭일에서 벗어나관광모드로 즐기시는 것 같았다. 양귀비, 매꽃에 무꽃... 한꺼번에 너무 많은 꽃이름을들어 머리 속이 과포화되긴 했지만 한달살기 과분한 환영식이 고마웠다.
이동 중에만난 고사리밭에 들어가 고사리도 몇가닥 뜯어보았다. 먹어보기만 한 고사리, 또 산길 다니면서 고사리잎 보기만 했지 식용이 되는 어린 고사리 순을 직접 따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숙소에 와서 야들야들한 생고사리 데친 걸 먹어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 어떤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에서 식탁으로 직행하는 먹거리 체험은 '한달살기'가 아니면 어디에서 경험할까.
오리엔테이션 2. 동네 이웃이 알려준 제주 작물 정보
올레길 가는 버스를 타러 나가다가 이웃 집 도로변에서 마늘을 말리고 계시는 동네분을 만났다.
"이게 뭐예요? 마늘 말리시나 봐요." 했더니 "아니, 이건 쪽파 씨야."하신다. 쪽파의 알뿌리와 마늘을 구별못하는, 채소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도시 사람 둘이 답답해 보였는지 자기 집 본채 뒤 텃밭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일일이 보여주신다.
쪽파 씨 작업을 하고 있는 동네 이웃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이건 대파, 부추, 쪽파, 상추, 고추, 콩, 갓, 고수까지. 고수를 텃밭 채소로 재배하는 게 신기했다. 먹을 줄 아느냐고 하신다. "그럼요. 전 고수 킬러인걸요. 그런데 이렇게 작물로 키우는 건 진짜 처음 봐요." 또 길 건너편 무꽃 핀 밭을 가리키며 꽃 피면 무는 먹으면 안된다고. 그런데도 꽃대 오른 무도 캐내서 서울로 내다 파는 사람이 있다고 안타깝다고 하셨다. 우리 집 옆 당근밭에 당근 캐내고 심겨진 작물이 뭐냐고 여쭤봤더니 콩이란다. 콩 수확 후 다시 당근을 심는다고 한다.
이게 쪽파 씨앗이라네요. 마늘이 아니고.
당근 캐낸 밭이 감자밭으로 변했다. 당근과 감자가 한 땅에서 교대 살이를 한다.
구좌는 당근이 유명한 동네라 지천이 당근밭인데 당근밭에 다시 당근 심기 전 콩 재배를 하는군. 명색이 '구좌읍 한달살러'인 내가 이 정도 동네 지식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동네 이웃으로부터 속성으로 받은 제주 작물 오리엔테이션이다.
오리엔테이션 3. 제주 버스 타는 요령과 제주버스 앱 사용법
관광나갔다가 제주버스터미널 앞 정류장에서 숙소로 돌아오려고 101번을 기다리고 있는데 웬 아주머니가 어디가냐고 물으셨다. 세화로 간다고 하니 왜 101번을 타냐고 그건 3,000원이라 비싸니 터미널 안 정류장에서 201번 1500원짜리 일반버스를 타라고 하신다. 20분 간격으로 있다면서.
201번을 타면서 세화고등학교 가냐고 물으니 옆자리 아저씨가 이 차는 세화읍만 가고 세화고등학교로 가는 차는 다음 201번이라고 하신다. 여행왔냐고 물으시더니 제주버스 앱을 깔으라고 하신다. 노선 검색과 시간 보는 법을 빠르게 가르쳐주셨다.
이제야 제주 시내 교통이 이해된다. 도시처럼 노선에 적혀있는 모든 정류소에 버스가 다 서는 게 아니구나. 같은 노선 버스가 세화읍에는 매번 가도 우리집 부근은 하루 몇번밖에 안다닌다는 얘기다. 이런 시스템을 몰라 작년에 제주 왔을 때 올레길 끝에서 돌아가는 길이 난감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한경면에서 공항갈 때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비행기를 놓칠 뻔 했다. 그러고 보니 어떤 글에서 본 적이 있다. 제주는 카*** 등 전국구 네비앱이 잘 작동하지않는다는 사실을. 제주여행자는 꼭 제주버스앱을 깔자.
제주도민이 원래 이렇게 긍정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인가? 곳곳에서 한달살기 생존법을 알려주시네. 여행 비법과 제주 밭작물 정보에 버스 이용법까지. 덕분에 한달살기에 필요한 숙소와 생필용 부식 채우기의 하드웨어 셋팅에 이어 소프트웨어 준비도 완료되었다. 이 정도 오리엔테이션이면 제주에서의 한 달, 그 누구보다 풍성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