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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May 17. 2022

제주 오일장과 건강검진의 공통점

제주 오일장의 발견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세화 오일장의 발견


내가 사는 구좌읍 세화리에서 5일과 10일 단위마다 오일장이 열린다. 10년 전 제주 여행 때 세화항을 지나다가 오일장 건물을 본 적이 있었다. 빈 뼈대만 있는 건물이 덩그러니 바닷가에 있었는데 그곳이 5일마다 장이 열리는 장터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내게 오일장이란 개념조차 없을 때였다. 이번에 와서 세화 해변을 걷다가 다시 보니 세화오일장은 바닷가에 바로 접해 있다. 명불허전의 오묘한 물빛과 윤슬 반짝이는 세화 바다에 딱 붙은 위치라 전국에서 가장 뷰가 좋은 장터가 아닐까 싶다.


세화오일장과 오일장 앞 바다


제주에 몇 년에 한 번씩은 왔지만 늘 사오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빠듯한 여정에 가보고 싶은 곳은 많아 제주 동서남북을 종횡무진하며 점만 찍고 다니다 보니 오일장에 찾아가 볼 생각을 한 번도 못했다. 이번엔 한달살기로 내려왔으니 꼭 오일장에 가봐야지. 달력에 지역별 장날부터 체크했다.


제주 오일장(원 지도 출처 : daum.net)

< 제주 오일장 >

1일, 6일 : 대정, 함덕
2일, 7일 : 제주시, 표선
3일, 8일 : 중문
4일, 9일 : 한림, 고성, 서귀포
5일, 10일 : 세화


날짜별로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5일장이 서는 매우 합리적인 방식이다. 마음만 먹으면 한 달에 몇 번도 갈 수 있겠군. 그리하여 여행자도 아니고 주민도 아닌, 여행자와 주민 사이, 엄밀히 말하면 '여행자이되 주민 체험하는 한달살러'의 정체성을 장착한 채 우리 동네 세화오일장부터 '탐험'하기 시작했다.



제주 오일장에서 만난 것들


보름간 제주에서 지내며 제주장에 한 번, 고성장과 세화장을 몇 차례 다녀왔다. '제주 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뭘까?' 궁금해하던 내 시선을 끈 것은 고사리 앞치마와 작업용 여성 방수 바지였다. 고사리 앞치마는 봄에 고사리 순 따러 다니는 아낙네들에게 최적화된 작업용 앞치마다. 앞치마의 원래 기능인 옷을 보호할 뿐 아니라 넓은 삼단 주머니에 임시로 갓 뜯은 고사리도 넣어둘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 방수 바지는 밭일할 때 입는 일명 몸빼바지의 바다 버전이다. 물에서 천초(우뭇가사리, 우미(제주어)) 작업할 때나 *해루질할 때 입는 기능성 바지다. 역시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해루질 : 물빠진 갯벌에서 어패류를 채취하는 일)

 

고사리 앞치마(왼) & 방수복(오)


제주 장에는 중국산도 북한산도 아닌 최고급 제주산 말린 고사리는 물론 갓따와 삶아낸 초록빛 감도는 탱글탱글한 햇고사리도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삶은 햇고사리는 본 것도 먹어본 것도 생후 처음이었다.


헷고사리의 청초함이란...


제주 갈치와 옥돔은 이제 워낙 유명해서 전국으로 택배 다니기 바빴고 그 틈새 제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은 생선 무더기가 있었으니 '자리돔(자리)'이었다. 자리물회는 '제주 사람은 자리물회로 여름을 난다'고 할 만큼 즐겨먹는 계절물회다.


자리물회 횟감(왼) & 톳물김치(오)


세화장에는 반찬 가게도 성업 중이었는데 집에서 밥만 해서 이곳 반찬으로 지내도 될 만큼 가짓수도 풍성했다. 그중 특이한 반찬을 발견했는데 톳물김치였다. 톳밥, 톳무침, 톳김밥까지 먹어봤는데 제주 와서 톳물김치까지 입문하게 되나? 궁금한 맛은 못 참지. 오천 원어치 사 와서 국수를 말아먹으니 별미 중 별미였다.



오일장에서 즐기는 조식 코스 요리


제주의 오일장에 가보려는 여행자를 위해 하나의 팁을 알려드리자면, 오일장엔 아침에 공복에 가야 한다. 건강검진 때처럼. 호캉스의 꽃은 조식, 오일장의 꽃은 주전부리다. 주전부리도 잘 엮으면 훌륭한 코스 요리가 된다. 오일장에 처음 간다면 장터의 쇼핑 라인을 따라가면서 요기거리의 종류를 먼저 스캔해둔다. 그런 다음 어떤 순서로 무엇을 먹을 건지 정한다. 이런 방법으로 '자가 맞춤형 조식 코스'부터 먹은 후 필요한 부식과 과일을 사 오면 된다.


며칠 전 갔던 세화 오일장에서는 빙떡을 스타터 요리로 시작해 모둠튀김과 칼국수를 메인으로 쑥호떡을 디저트로 먹었다. 시장 한켠 분식 코너에 앉아 칼국수를 먹다가 무심히 비닐 천막 밖을 보니 환상적인 세화 바다가 보이는 게 아닌가. 2인분 12,000원에 '바다 뷰의 조식 코스요리'라니, '음~ 전생에 내가 나라를 구하지 않고서는...'


세화오일장의 조식 코스 요리...


오일장은 대체로 오후 2시면 파장이고 점심때만 해도 손님도 물건도 빠져 썰렁하다. 나처럼 '취식'이 아닌 '알뜰 장보기'가 목적이라면 파장 즈음에 가는 걸 말리진 않겠다.




오일장은 상설장이 없는 시골이나 예전에 시골이었던 곳에만 남아있는 시장 문화 중의 하나다. 사실 제주는 시골이다. 게다가 섬이다. 한라산이 한가운데 있어 사람들이 주로 사는 해안 지역 간 교통이 불편하다. 이런 이유로 오일장이 아직도 제주 사람들의 물류의 중심으로 남아있지 않을까 싶다. 여느 시골처럼 제주 시골도 사람이 귀하다. 집집마다 노인 한 두 분뿐이니 장날에 장에 가야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물건도 사고 밥도 먹고 정보도 얻는다.


내일은 16일이니 대정읍에 장이 서는 날이다.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제주 배경의 TV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 이정은이 차승원과의 호텔 여행에서 화나는 감정의 극한 상황에서도 '호텔 조식'을 사수하는 대사를 뱉는다. "나, 내일 아침, 조식 먹고 갈껴." "대정오일장? 나, 조식 먹으러 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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