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착 비행기가 공항에 부려놓은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좋아서 찾아간 곳마다 관광객이 하나도 없었다. 좋기만 한데 사람들이 왜 안 가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제주 여행을 하면서 나의 여행 취향을 의심해보았다. 나의 여행 취향이 대중적이지 않은가?
대중적이지 않다 해도 할 수 없다. 누구는 제주에 와서 요트 투어 하거나 서핑하며 바다 액티비티만 즐기다가 갈 거고 누구는 골프 치러 제주에 오겠지. 누구는 바다 뷰의 감성 카페만 찾아다닐 거고. 누구는 맛집 방문, 성지 순례가 목적 이리라. 한라산에 오르러 혹은 올레길이나 곶자왈 길만 주야장천 걷다가 가는 제주 여행도 있다. 나도 내 멋대로 제주를 즐길 테다.
나의 대중적이지 않은 '나의 여행 취향지' 세 곳을 소개해보니 관심 있는 독자는 직접 검증해보시길 바란다.
검은 용암언덕을 전경(前景)으로 깔고 앉은 성산일출봉, 오조 포구
한국에서 가장 비싼 땅은? 오조리. 한 걸음 뗄 때마다 5천원짜리 땅을 밟고 가는 거란다. 오조 포구의 보말칼국수 집에서 제주분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머 코드를 이해 못 함. '한국에서 가장 싼 땅은 일원동'이라는 추가 이야기에 그제야 웃음이 터졌다.
오조 포구는 '공항 가는 길'이라는 TV 드라마를 보며 처음 발견한 곳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검은 용암이 섬처럼 앉은 낮은 바다 뒤로 성산일출봉이 아스라이 보여 저기가 어딘가 궁금해했었다. 육지와 연결된 성산일출봉과 다리인지 둑인지 갑문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호수인 듯 바다인 듯 혼돈을 가져왔다.
낮은 용엄언덕을 섬처럼 깔고 앉은 성산일출봉
오조포구에서 성산일출봉의 전경(前景)을 바꿔보아요~ 맨날 보던 광치기해변 말고.
바다이되 호수 분위기를 내는 이곳엔 점성이 작은 용암이 만든 용암언덕인 투물러스(Tumulus)가 유난히 많다. 용암이 흐르던 중 내부의 가스가 차면 그 압력 때문에 꾸덕꾸덕 굳어가던 표면을 빵처럼 부풀리게 하는데 이렇게 식은 낮은 구릉 모양의 용암 지형을 투물러스라고 한다. 이들 투물러스들이 얕은 오조 포구 앞바다에 점점이 떠 있어 마치 누가 일부러 갖다 놓아 조성한 인공 연못인 것처럼 조형미가 있다. 포구의 내륙 쪽엔 갈대류의 수생식물마저 보태니 손색없는 한 폭의 바다정원이다.
이거 조경해놓은 것 아닌가요?
성산일출봉과 광치기해변에 간다면 바로 옆의 오조포구도 한 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올레길 2코스의 일부이기도 하고 광치기해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조포구를 한 바퀴 도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제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하구는 쇠소깍이다. 쇠소깍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주상절리의 계곡미를 가진 용연도 있고 먼발치에서 살짝만 제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는 무수천도 있다. 강정천은 작년 봄 올레 7코스를 걷다가 처음 알게 된 곳으로 꼭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강정교 근처에 차를 세우고 계곡으로 내려가니 눈앞에 돌들이 펼쳐졌다. 육지에서 보던 화강암 하천과 다른 현무암 하천만의 개성미가 넘친다. 현무암 사이를 흐르던 하천수가 주된 에너지원으로 힘차게 깎고 부차적으로 바닷물이 찰방찰방 다듬어 만든 작품이다.
강정교 쪽에서 바다 쪽으로 본 강정천
강정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하구 끝에 오니 용암괴석과 폭포와 주상절리가 한꺼번에 바다정원을 완성한다.
하천의 돌들을 옮겨 짚어가며 바다까지 나가 보았다. 다시 반전이다. 흐르는 강물에 의해 둥글게 다듬어진 돌이 아니라 수성 분출한 용암 덩어리가 바닷물에 급하게 식은 듯 거친 표면의 용암괴석이 장관이다. 과연 하천과 바다의 합작품답다. 강정천 끝자락에 서니 범섬도 보이고 주상절리와 육각형들도 나타난다. 스스로 용암 하천임을 증명하고 있다. 바다 쪽을 보다가 육지 쪽을 보다가 카메라 셔터만 바빠졌다.
하도해변은 지난겨울, 근처에 묵게 되면서 알게 된 곳이다. 홈쇼핑으로 구입한 숙박권(비추...)을 써 없애기 위해, 비인기 지역이라 예약이 수월할 것 같아 묵었던 숙소가 하도철새도래지 근처였다. 덕분에 일부러라면 가지 않을 곳을 알게 되었다. 예상치 않게 뜻밖의 여행지를 발견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하도리와 종달리를 잇는 둑에 서서 바다 쪽을 보면 엄청난 물빛과 고운 모래의 하도 해변이 펼쳐지고 내륙 쪽을 보면 갈대 습지가 나타난다. 하도해수욕장을 포함한 하도 해변은 주변 위락시설이 부족해서인지 갈 때마다 한적했다. 주말엔 캠핑객들이 호젓한 캠핑을 즐기기도 한다.
하도둑을 지나며 찍어본 하도 해변. 사진이 너무 구리다. 실물은 훠얼씬 예쁨.
카약과 패들보드를 즐기는 사람들. 하는 이도 즐겁고 보는 이도 즐겁네.
하도해수욕장에서 둑을 지나 종달리까지 걸어서 봐야 하도해변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올레 21코스와 겹치는 구간이다. 투명카약이나 패들보드를 타는 사람들도 한 점의 그림이 되어준다. 내륙으로 들어가면 하도철새도래지 습지를 만나게 된다. 갈대(내가 이름 모르는 수생식물은 갈대로 통칭함.) 뒤로 잡히는 지미봉이 이 구역 모델을 자처한다. 제주에 이런 갈대 우거진 습지라니. 전혀 제주스럽지 않은 습지가 가장 제주스러운 바다와 공존하는 곳, 내가 찾은 또 하나의 바다정원이다.
세계적인 배낭여행 가이드북인 '로운니 플래닛(Lonly Planet)'을 보면서 여행하던 시절, 그 책의 표현에 낚여 갔다가 실망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필리핀 바나우에의 라이스 테라시스와 일본 규슈의 에비노고원이 그랬다. '배낭여행객의 성지'니 뭐니 하는 호들갑에 나 또한 천지를 모르고 부화뇌동했다. 물론 좋았던 곳도 많았지만...
여행지 소개와 추천은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로운니 플래닛은 서양의 젊은 트래커의 관점이니 '논 뷰'만 봐도 '판타스틱'하겠지. 우리는 맨날 보는 논인데 말이다. 이제는 로운니 플래닛의 감탄 문구에 속지 않고 행간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위에서 추천한 제주의 바다 정원 세 곳도 어디까지나 '좀 심심하고 호젓한 걸 좋아하는 자연여행자'인 추천자의 여행 취향을 고려해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