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지옥 서울을 떠나 강원도 고성에 왔다. '지인의 친구의 동생'의 세컨드 하우스를 한달살이 집으로 얻었다. 한 달 세입자인 나와 집주인은 세 다리 건너 연결된 사이다. 강원도 고성도 처음이지만 '거진항'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항구에 '한달짜리 우리 집'이 있다고 한다.
'한달살기 전국일주'를 처음 계획했을 때 막연히 동해안 북부 대표 도시인 강릉이나 속초에서의 한 달을 염두에 두었다. 제주 한달살기에 이어 강릉이나 속초 한달살기도 늘고 있다고 하니 여행 인프라가 어느 정도 되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고성의 집을 소개받았고 지도를 보니 고성은 속초에서 차로 한 시간이 안 걸리는 거리였다. 전국 각지를 한 달씩 살며 돌아다니는 '한달살기 여행' 중인데다가 남한의 최북단인 고성을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가보겠느냐 싶었다. 또 고성을 기점으로 속초와 강릉을 연계 여행하면 되겠다 싶어 '고성에서 한 달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그 기저에는 집을 안 알아봐도 된다는 점이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사실, 한달살기 집 구하기도 은근히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한달살기 여행을 하니 달마다 집이 바뀐다. 3월부터 시작된 여행이 다섯 달째에 접어드니 집도 다섯 군데를 옮겼다. 여행을 시작한 첫 달 3월에는 부산 대연동의 대학가 원룸 타운에서 살았고 4월은 거제도 옥포 바닷가의 레지던스 호텔, 사실상 아파트나 다름없는 곳에서 지냈다. 5월의 제주에서는 구좌읍 당근밭 한가운데 있는 농가주택을 거점으로 제주를 걷고 또 걸었다. 직전 달인 6월은 서울 서대문구의 단독주택에 살며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내가 심심한 천국에서 살 관상인가
대구에서 고성까지는 길이 멀었다. 5시간반이 걸려 도착한 고성 우리 집은 거진항과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자리한 집이었다. 통영의 동피랑이 연상되었다. 아니 삼척항의 어촌 마을 나릿골과 더 닮았다. 미로처럼 난 좁은 언덕길을 따라 집들이 총총 들어서 있었고 바다가 코앞이었다. 언덕을 통해 평지 주택들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가구수가 꽤 되는 항구 마을이었다.
집에서 내려다 본 거진항
바닷가 우리 동네
고성의 집에 들어서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살아본 집 중 여기가 제일 좋아!" 진정 바다 뷰의 이 집이 내 집이란 말인가. 거실에 앉아서도 바다가 통으로 보이고, 방에서도 방문만 열면 또 창문으로도 바다가 여과 없이 들어온다. 전형적인 어촌 집을 그대로 둔 채 내부만 개조한 집이라 주변과 이질감이 없었고 집 앞에는 막 진경산수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집주인은 분명 바다 뷰에 반해 이 집을 샀을 거야." '전망이 다했다'란 말은 이 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한 달 살면 남은 생 동안 바다 뷰 카페는 더 이상 안 가도 될 것 같았다.
집 거실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바다가 내 방 창문에도 걸렸다
초고밀도 주택가에서 살면서 소형차 한 대 세워둘 한 뼘 공간이 없어 유료주차장에 월 15만 원의 주차비를 물었던 서울에서의 가슴 쓰렸던 기억이 한 방에 날아가며 속이 확 트였다. "그래,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새로운 곳에서." 한달살기 다섯 번만에 최고의 집을 만났다. 더군다나 지금은 폭염의 계절. 여기는 서늘한 천국이다. 우리가 떠나온 대프리카의 온도가 34도 찍던 날, 이곳 고성은 26도. 대프리카에서 못 벗어난 내 남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해야만 할 것 같다. "미안해. 우리만 탈출해서."
대구보다 체감온도가 10도나 더 낮은 서늘한 천국, 고성
집이 위치한 거진항은 고성에서 가장 큰 항구로 한때 명태잡이항으로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수온 상승으로 동해에서 더 이상 명태가 잡히지 않으면서 지금은 쇠락했지만 옛 명성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생선 경매가 열리는 수산시장과 배 수리조선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 있는 해변을 낀 휴양형 항구가 아니다 보니 바다 전망 카페 하나 없고 여름 피서철조차 관광객이 별로 찾지 않는 조용한 곳이다. '음, 바다 뷰의 시원한 천국까지는 좋은데 심심한 천국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거진항의 선박수리공장
명태 이름, 한 번에 정리해드립니다.
영화 찍을뻔한 집에서 한달살기
바닷가 비탈길 자락의, 잘생긴 소나무가 엄호하는 우리 집, 영화에나 나올법한 집에서 한여름을 보내게 되다니 나도 몰랐는데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보다. 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진짜 영화에 나올 뻔했다고 한다. 영화배우 라미란이 나오는 영화 '정직한 후보 2편'을 찍겠다고 집주인에게 촬영지 섭외가 들어왔다는데 한참 시간이 흘러 나중에 보니 영화가 이미 만들어져 나왔다는...
영화 찍을뻔한 집에서 한달살기, 첫행보는 거진항 우리 집 뒷산 넘어 김일성 별장을 거쳐, 걸어서 통일전망대까지(해파랑길 49코스). 영화가 별 건가, 우리네 인생이 영환데... "고성 한달살기, 레디~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