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여행 가서 난생처음 알았다. 전라도라는 이름이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는 것을. 전주는 지금도 전북의 대표도시니 그렇다 치고 나주가 왕년에 그렇게 존재감 큰 고을이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여행을 하니 내가 조금씩 똑똑해지는 것 같아 스스로 기특하다.
광주에서 출발해 영산대교를 건너니 '600년 홍어의 거리'라는 이정표가 못 보려야 못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붙어 있었다. 영산포에서 홍어를 먹고 주변 명소를 둘러보았다. 영산포역사갤러리에 들러 지도를 받고 일본인지주가옥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도 찾아봤다. 나주 관광을 마치고 차 머리를 돌리다가 보니 영산포 시내 풍경이 남달랐다. 단층 혹은 군데군데 낮은 이층 건물이 도로를 따라 늘어졌을 뿐인데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이 느껴졌고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홍어거리가 곧 적산가옥거리다.
100년 전 영산포를 걷다
놀랍게도 나의 촉은 틀리지 않았다. 며칠 후 영산포에 다시 가서 찬찬히 보니 그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정체는 홍어거리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이었다. 가파른 지붕 경사, 직선형 지붕 보와 직선 처마, 이중 처마, 처마 아래의 사각 서까래, 눈썹 창문, 목조주택... 근대 일본식 가옥, 소위 서양주택을 모방한 '문화주택'의 모습이다.
단지 몇 채가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건물은 눈에 띄게 이국적이기도 하고 어떤 집은 자세히 뜯어봐야 일본식 가옥을 개조한 것인 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순간 나는 100년 전 영산포로 시간 이동을 해버렸다. 옛 영산포에 홀려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런 집들을 '적산(敵産)가옥'이라고 한다. 홍어 거리 도로변이 상점들은 대부분 이층으로 된 적산가옥들이었고 언덕을 따라 난 샛골목에도 단층짜리 일본식 상점과 여관들이 줄지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본인 대지주의 저택이 위치한 동네였고 또 멀지 않은 곳에 조선식산은행 영산포 지점도, 동양척식회사 건물도 있다. 추측해봤다. '음, 규모로 봤을 때 영산강 이남 이곳은 일본인들의 대규모 집단 거주지?'
일본인 지주가옥(왼), 조선식산은행 영산포지점(오)
일제강점기, 영산강의 강남 신도시 영산포
항구도 아닌 이곳을 왜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였을까? 조선시대 때 나주 영산포는 나주, 장흥, 순천, 영광 등 26개 고을의 세곡(稅穀)을 거두어 보관하던 영산창(榮山倉)이 있던 곳이다. 영산강의 물길을 이용하여 조운선 53척이 800석의 곡식을 실어나르던 포구로서 물자의 집산지와 거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영산강을 오가는 배들의 이정표 역할과 수위 조절 수준표 기능을 하던 영산포등대
1897년 목포가 개항되면서 일제는 나주평야 일대의 쌀을 목포로 실어 나르기 좋고 드넓은 미경작지가 있어 개발잠재력이 높은 영산포를 식민 수탈의 거점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리하여 군산, 목포와 함께 나주가 일제강점기 호남의 3대 수탈지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영산포에 일본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계획적으로 신작로를 내고 호남선 철길을 놓고다리와 등대를 세웠다. 배후 농지를 약탈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 영산포지점을 설치하고 일본인들의 정착과 상업 활동을 돕기 위해 조선식산은행 지점을 두었다. 거주하는 일본인이 늘어났으며 일본인 학교, 일본 사찰은 물론 고급 상점이 늘어선 번화한 곳의 대명사인 '긴자(銀座) 거리'도 생겨났다. 그야말로 영산강 이남에 일본인을 위한 강남 신도시 하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적산가옥, 문화재이거나 아니거나
일제강점기 때의 영산포 지도가 궁금했다. 오늘날과 비교해보고 싶었다. 고려시대 때부터 물자와 돈이 넘쳐나고 사람 모여들던 포구 초입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중심 상권으로 발달했다가 지금은 외지인들이 찾는 홍어 상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미 쇠락한 주변은 사람 마주치기 어려운, 한적한 시골 동네가 되어버렸다. 적산가옥이 다닥다닥 붙은 거리만이 옛 영화(榮華)를 상상할 단서를 제공한다.
일제강점기의 적산가옥은 군산이나 인천, 목포 등에 원형이 잘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일본인들이 상권을 형성해 살았고 전쟁 피해가 없었던 대구와 부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포항의 구룡포는 일본인 주택 거리를 복원해 관광명소를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일제의 흔적이 나주 영산포만큼 동네 몇 개가 통째로, 거의 도시급으로 남아있는 곳이 또 있을까? 다른 도시의 적산가옥들은 주변이 개발되고 도심 속 건물 숲에 묻혀있어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낱낱이 산발적으로 존재한다. 반면에 나주 영산포는 대로와 골목 전체가 적산가옥 집합소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고개를 들 때마다 적산가옥을 만난다.
잘 보존된 적산가옥은 가치 있다. 그러나 영산포의 거리의 집들은 해방 후 적산가옥 한 채 혹은 일부를 불하받아 고치고 다듬으며 근대를 관통해 온 보통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다. 박제되어 전시된 집은 엄밀히 집이 아니라 한 때 집이었던 곳이다. 사람이 살아야 집이다. 이곳의 집들은 낡고 소박하다. 그러나 세월을 견디며 오늘도 홍어 판매점 간판을 달거나 자전거포로, 식당으로, 한창 현역의 기능을 수행 중이다. 그래서 애잔하다. 굳이 '문화재'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소중하다.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다. 적산가옥은 처음 집을 지어 살았던 사람은 일본인이었을지라도 그 집을 '더 오랫동안 지키고 살았고 또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은 우리다. 무조건 일본 잔재라 치부되고 평가절하될 순 없다.
홍어 먹으러 왔다가 옛 영산포의 모습도 한 번씩 그려보게 하면 어떨까? 특히 일제강점기 때의 모습을 잘 찾아볼 수 있도록 그때의 기록을 정리하고 안내해 둔다면 의미 있는 다크투어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