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트립 Sep 04. 2022

5시 18분에 광장 시계탑 앞에 서보라

광주 도청 앞 광장에서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주의 옛 도청 광장에 왔을 때는 5시가 조금 안되었다. 광장 시계탑 앞에서 5시 18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노랫말 없이 연주곡으로만 나왔지만 내 마음속에선 이미 합창곡이었다. 5월 그날의 현장에서 들으니 유난히 곡조가 비장하다.


8월 광주는 힘겨웠다. 폭력적인 일사량을 분사하는 여름 한낮을 견디느라 아스팔트도 사람도 다 같이 힘들었다. 내쉬는 숨을 허락하지 않는 공기를 뚫고 광주 시내 5·18사적지 12군데를 돌아다녔다.


5·18민주화운동 사적지는 지금까지 총 29개가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을 따라 걷는 길을 '오월길'로 명명해 놓았다.


반나절 동안 총 29개 사적지 중 12개를 찾아보았다.

1호 전남대학교정문 - 5·18민주화운동의 최초 발원지
2호 광주역광장 - 5월20일 시민들과 계엄군이 충돌해 사망자가 발생한 곳
3호 (옛)시외버스공용터미널 일대 - 5월19일 계엄군이 총검을 휘둘러 시민 희생자가 발생한 곳
4호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 5·18항쟁과 이후 투쟁들이 이뤄진 곳, 투쟁 기록물 전시관
5호 옛 전남도청, 5·18민주광장(분수대), 상무관 - 시민군 최후의 항쟁지, 민주화운동의 상징 장소
7호 광주MBC 옛터 - 왜곡보도에 항의하던 곳
8호 녹두서점 옛터 - 항쟁대책논의 장소
17호 상무대 옛터 - 계엄사령부 분소, 항쟁 참가 시민들이 구타와 고문, 부당한 재판을 받았던 곳
19호 양동시장 - 계엄군에게 고립된 시민군에게 시장 상인들이 주먹밥, 김밥 등을 전달한 곳
26호 505보안부대 옛터 - 민주인사들의 연행 및 구금 장소
28호 전일빌딩 - 계엄군 헬기의 공중 사격이 있었던 곳
29호 고 홍남순변호사 가옥 - 재야 민주인사들이 토론과 회의를 진행했던 곳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29곳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29곳


사적지 대부분은 5·18항쟁 관련 유의미한 장소이기는 하나 건물이 사라지고 터만 남았거나 지금은 일상의 현장이 되어버린 곳이 많았다. 돌로 만든 사적비만이 역사적인 장소임을 말해주었다. 나처럼 5·18유적을 따라 걸으려는 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코스로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5·18 민주화운동 코스 : 4호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 5호 옛 전남도청, 5·18민주광장(분수대), 상무관 - 28호 전일빌딩 - 17호 상무대옛터 - 24호 5·18구묘지


예전에, 가슴 아픈 과거를 따라가는 여행으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나가사키의 원폭기념관, 뉴욕의 911추모관, 베트남 꽝응아이(Qang Ngai)와 다낭 하미(Ha My)의 민간인 학살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들은 가슴 먹먹하지만 그래도 다크 투어 여행지로서 담담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는, 내가 사는 곳에서 차로 3시간이 안 걸리는 이웃 도시 시간적으로불과 40여년 전에 일어난 일이'사건의 객관화'가 잘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관통해온 시간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 이성적으로 유적지를 관람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단장해 개방한 전일빌딩에서 헬기 사격의 총탄 흔적을 건물 내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옥상은 5·18구심 장소였던 광장과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옛 전남도청을 내려다볼 수 있 조망대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전일빌딩 8층에 위치한 카페 또한 훌륭한 전망 쉼터다.


헬기 사격을 총탄 맞은 외벽으로 증언하고 있는 전일빌딩245. 총탄 개수가 245개라고 한다. 


전일빌딩 내부 기둥의 총탄 흔적


전일빌딩에서 민주광장을 내려다보한가운데 광장의 상징인 분수대가 보였다. 분수대 주변으로 광주 시민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민주를 외치던 5월 당시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때의 치열함과 뜨거운 함성을 상상해 보았다.


1980년 5월 16일의 광장(출처 : 사적 1호 전남대학교 야외 사진 기둥) 


42년 후 광장(2022년 8월 7일)


오월의 피, 오월의 희생은 우리 역사를 얼마나 진보시켰을까? 5월 광주로 인해 우리 사회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민주 질서와 의식이 소시민의 삶으로 들어와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해외, 특히 아시아 각국의 민중 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우리 역사는 5월 광주를 밟고 이만큼 왔고 또 앞으로 가고 있다. 세 걸음 전진하는가 하면 어느새 두 걸음 뒷걸음쳐있다. 그래도 한 걸음씩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싶다.


아직도 최초 발포 명령권자를 밝혀 단죄하지 못한 광주는 진정 역사적으로 정리된 것일까? 옛 전남도청 건물에 뜬금없이 붙은 아시아문화전당 간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대로 된 추모관 하나 없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추모하고 싶은 현장에서, 추모하고 싶을 때 추모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저기 당시의 건물과 사진과 기록만 보여주고, 각자의 방식으로 알아서 추모하라는 뜻인가.


발포 책임 논쟁을 언제까지 갖고 갈 것인가 


시계탑은 알고 있다(The Clack Tower Knows,  1980년 5월 독일공영방송 기사 제목(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매일 5시 18분에 당시를 지켜보았던 5·18광장 시계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고 한다. 추모관이 생기기 전까지는, 5시 18분 시계탑 앞에 서보는 것도 하나의 추모 방법이 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주 영산포에서 홍어만 먹고 오면 안 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