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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Sep 27. 2022

근대건축물에서 마시는 커피의 맛

근대를 관통해 온 공간 세 곳 / 부산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카페를 좋아할까? 뷰가 좋거나 감성 있는 공간이면 커피값이 비싸도 기꺼이 지갑을 연다. 내 지갑에서 나오는 돈은 커피값인가 공간값인가?


평소 획일적인 공간인 집과 사무실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 우리는 가끔 색다른 공간에 물리적인 내 몸을 놓아두고 싶어 한다. 그곳에서 익숙하지 않은 공기의 맛을 즐긴다. 커피 애호가라면 커피 맛을 찾아다니겠지만 커피에 특정한 취향이랄 게 없는 나는 종종 공간에 이끌려 커피집 문턱을 넘는다. 공간이 맘에 들면 커피는 십중팔구 맛있어진다. 설령 커피맛이 별로였다 하더라도 나의 뇌는 알아서 오(誤)기억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곳에서 행복했으므로 그곳 커피는 맛있었노라고.


그렇다면 커피가 무조건 맛있어지는 부산의 특별한 공간을 소개해보겠다. 근대를 살아온 기념비적 건축물로서 현재 카페로 운영되거나 미니 카페를 포함하는 곳들이다.



옛 백제병원(브라운핸즈 부산점)


격랑의 시대를 살아온 노령의 건물은 할 이야기가 많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근대 병원 건물이 카페로 변한 곳이라 해서 궁금했다. 병원과 카페는 연결점이 없는 조합이다. 옛 백제병원은 현대 건축물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세련되게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다. 사람으로 치면 멋있게 늙어가는 노신사쯤 되지 않을까.


옛 백제병원(브라운핸즈 부산점)


백제병원은 1930년 김해 출신 최용해가 야심 차게 지은 부산 최초의 사립종합병원이었다. 일본 직수입 벽돌로 5층으로 지고 병상이 40개가 넘었다. 당시 큰 병원이었던 부산부립병원과 철도병원보다 규모와 시설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몇 년 가지않아 재정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병원장이 건축 당시 채무를 졌던 동양척식회사에 처분권을 넘기고 일본으로 야 도주하다시피 하면서 이후 병원 건물은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사연 많은 삶을 살게 된다.


1932년 중국인에게 넘겨져 봉래각이란 중국요리점으로, 1942년에는 일본인 장교 숙소로, 해방 후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학병들이 중심이 된 학병치안본부로, 중화민국 임시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6·25 이후엔 예식장으로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고 화재(1972년)도 겪었다. 병원에서 식당, 숙소, 사무소, 공관, 예식장까지 닥치는 대로 전천후 삶을 살아낸 건축물은 이제 카페가 되어 누구든 친절하게 맞아주고 있다.


카페가 된 병원


건물 내부가 그간 용도에 따라 숱한 변형을 거쳤지만 꾸안꾸 스타일의 리모델링 탓인지 건물이 주는 투박함과 중후함은 그 어떤 곳보다 강하다. 덩달아 커피 맛도 묵직하다. 부산역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으니 위치 또한 강점이다. 명물 카페 많기로 소문난 도시 부산에서 딱 하나의 카페만 가봐야 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초량1941


초량1941은 부산 앞바다와 부산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부산의 대표 산복도로-산허리를 감아 돌며 난 도로-망양로에 있다. 부산역에서 보로 출발해 이바구길 모노레일을 타고 가면 재미있고도 편하게 갈 수 있다. 이곳은 적산가옥을 개조한 우유카페다. 짐작하다시피 1941은 건축연도다. 옛 초량 소를 먹이는 목장이 있던 곳이라 하고 그래서인지 이곳은 우유음료를 주력으로 한다.


초량1941전면(왼) & 옆면(입구)(오)


집주인이었던 일본인이 일본인거류지역인 용두산 일대 아닌 이곳에 집을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당시 도심에서 접근하기도 어려웠을 구봉자락에 잘 지은 일본인 택이라니. 혹 별장이었을까? 일본 주택의 특징인 전형적인 겹처마를 단정히 가진 집은 서양식 응접실을 정면에 달아내어 나름 멋을 부렸다. 카페 안을 두리번거리며 일본집의 디테일을 찾아보는 것은 손님의 특권이다.



옛 정란각, 문화공감 수정


정란각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이곳은 일본인 사업가 다마나 미노루의 주택(1943년 건축)이 적산가옥으로 남은 곳이다. 반갑게도 문화재청에서 매입해 전시관과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 때 미군장교숙소로도 쓰였고 정란각이라는 요리집으로 오랜 기간 이용되었다고 한다. 정란각 시절엔 본채 뒤로 접대부들이 대기하던 공간이 딸려있었다고 한다.


옛 정란각


워낙 잘 지은 저택이고 복원도 훌륭하다. 쇼인즈쿠리(書院造)양식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무사주택이라고 한다. 당시 유행을 좇아 서양식 가미되었다. 1층 방의 도코노마((床の間 조상신과 관련된 물품을 올려두는 곳)와 집주인의 안목이나 취향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 공간, 치가이다나(違い棚)도 고스란히 보인다.


도코노마와 치가이나나가 있는 1층 실내(왼) & 2층 다다미망


2층은 더 놀랍다. 장지문(후스마)을 걷어내면 연회장으로 쓰였을 공간 스즈키마가 펼쳐진다. 구석구석 어디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데가 없다. 곳곳에 과일이나 전통 문양을 조각해 공을 들였다. 1층과 2층 사이에 반2층 방도 놓치면 아까운 독특한 공간이다. 응접실이라는 안내에도 불구하고 2층 연회장에 낼 음식을 준비하거나 일하는 사람이 대기하는 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해본다.


이곳에서도 미니 카페를 운영한다. 차 한잔 받아 들고 집주인 코스프레로 차를 즐겨보자. 2층의 너른 다다미방에 자리 잡고 앉으면 일본집 실내의 특징이라는, '감쇄된 햇빛의 차분함'도 즐길 수 있다.




카페는 진화하고 있다. 재기 발랄하다 못해 문화 충격일 정도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카페들이 자고 나면 생겨다. 세련된 카페도 좋지만, 때론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과 역사를 품은 이들 근대건축물 카페는 어떤가.


특별한 공간에서 마시는 커피는 저절로 스페셜티 커피가 되리라. 그런데 커피맛이 다가 아니다. 덤도 있다. 의도치 않게 역사 공부도 되고, 저절로 건축 공부도 된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런 근대건축물을 찾아주는 내 발걸음이 곧 건축물을 살리고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큰 기부는 못해도 이 정도 기부는 가뿐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 위치 참고

위 3곳을 묶어갈 때의 동선 예시. 부산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다. 이바구길 모노레일(무료) 타고 가는 방법 강추.

※ 참고서적

『부산이야기99』주경업, 부산민학회

『길모퉁이 오래된 집』최예선,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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