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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Nov 19. 2022

100년 거리와 목포의 눈물

목포 근대 거리를 걷다(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누구나 들어봤을법한 '목포의 눈물'이다. 목포 거리를 지나거나 유달산을 지나갈 때면 늘 귓가에 들렸다.


여행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 국내도 넓고 갈 곳은 많았다. 한달살기 전국일주를 위해 도시를 열두 개 골라야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안 가본 곳, 막연히 재밌을 것 같은 대도시, 바다를 낀 도시를 중심으로 도시 규모와 지역을 고려해 여행지를 선정했다.


이제 여행도 9개월째다. 도시 여행은 대체로 건축물 여행이고 근대건축물인 경우가 많았다. 일제 강점기 때의 같은 이름의 건물이 이 도시 저 도시에 공통적으로 남아있어 신기했다. 예를 들자면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부산과 *나주, 목포에서 만났다(*출장소). 이참에 근대건축물을 지역별로 집중적으로 찾아보고 싶어졌다. 애초 계획했던 전남 여행지를 여수에서 목포로 바꾼 것도 그 때문이었다.



100년 거리, 100년 동네가 공간 문화재로

 

목포에 와보니 넓은 면적에 걸쳐 근대 거리가 통째로 남아있었다. 1897년 개항하면서 무역항으로 기능하다가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오고 물류와 교통이 좋은 항구 쪽에 일본인 거류 지역이 형성되었다. 여기까지는 부산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목포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만호동 일대에 놓인 바둑판 모양의 신작로와 이를 기반으로 생겨난 일본인 상업거리와 주거지역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고 남아있다.


목포진터 주변 22만 평의 동네가 우리나라 최초로 개별 건축물 단위가 아닌, 면(面) 단위의 공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유네스코에서도 도시 하나를 유네스코 문화 유산 도시로 지정하는 것처럼. 말 그대로 '지붕 없는 박물관'인 이곳의 공식명은 '근대역사문화공간(등록문화재 제718호)'이다.



근대로의 출입문, 구 일본영사관


근대로 가는 여행은 노적봉 기슭에서 출발한다. 이곳에서 만나는 구 일본영사관은 위치로나 상징성으로나 근대 공간으로의 출입문이다. 공교롭게도 숙소에서 가까워 하루에도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렸다.


무안반도 노령산맥의 기세가 바다로 소멸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반도 끝에 작정하듯 박아 놓은 암봉이 유달산 노적봉이고 그 바로 밑에 구 일본영사관이 절묘하게 앉아있다. 한눈에 봐도 이국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는 붉은 벽돌 건물은 일본영사관으로 지어졌다가 이후 목포부청으로 사용되며 식민지 시절 정치·경제 수탈의 본부가 되었다고 한다. 건물이 가진 이야기는 슬펐지만 건물 자체는 얄밉도록 세련되었고 단풍 숲과 어울려 아름다웠다.   


구 일본영사관(1909)


지금은 목포근대역사관(1관)으로 이용되며 여행가이드 역할을 하는 곳이다. 구 일본영사관을 자주 다녀본 목포 한달 여행자로서 영사관 탐방 팁을 몇 가지 제공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 일본영사관 여행 관람 포인트 몇 가지
1) 주변의 높은 지대에서 구 일본영사관을 조망해 보라. 특히 목포진지에서 구 영사관을 조망해보라.
    ...서산동 시화골목 꼭대기인 보리마당도 좋은 전망처다.
2) 구 영사관 안에서 창문을 통해 항구 쪽을 내려다보라.
    ...일직선상으로 뻗은 대로를 따라 난 일본인 지역의 행정 및 상업 중심 거리가 시간을 100년 전으로 돌려준다.
3) 건물 곳곳의 욱일기의 상징을 찾아보라.
    ...건물 창문 주변에 흰 벽돌을 이용해 욱일기 상징을 표현했다. 심지어 건물 하단의 통풍구에서도 찾아   볼 수 있고 실내 천장등 주변도 욱일기 상징으로 의심된다.
4) 구 일본영사관 턱 아래 세워둔 소녀상을 찾아보라.
    ...소녀상이 가진 상징만큼이나 위치도 의미가 있다.



노적봉 단풍 숲아래 독보적으로 위치한 구 일본영사관(1900, 현 목포근대역사관1관)


구 영사관에서창 밖을 보면 일본 조계지는 물론 바다까지 조망된다.


흰 벽돌을 넣어 욱일기 문양을 상징했다. 창문과 통풍구 아치까지도(왼). 건물 실내의 천장등 거치 장식(오)


구 일본영사관과 소녀상


문화재이거나 아니거나


목포 근대 거리는 제718호로 묶인 15개의 건물 뿐 아니라 국가지정·도지정 문화재, 등록 문화재를 망라하고 일일이 헤어보면 23개 건물을 포함한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구 호남은행 및 번화로와 해안로의 일본식 가옥과 상가주택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구 일본영사관에서 출발해 안내 동선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돌 반나절이 훌쩍 다.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1921, 현 목포근대역사관 2관)


구 호남은행목포지점(1929, 순수 민족 자본에 의해 건립된 은행)


한편 문화재를 찾다 보니 도대체 문화재의 기준은 무엇인지 의아해졌다. 지정된 문화재보다 더 문화재 같은 건물이 도처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눈만 돌리면 일본식 가옥이요 일본식 상점이라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손이 바빴다. 일층은 가게이고 이층은 살림집으로 쓰인 주상복합 건물(마치야)과 긴 지붕 하나로 된 연립형 상점인 장옥(長屋 나가야)도 즐비했다.


번화로의 일본식 가옥들

                                                                                                                                              

번화로의 일본식 상가주택(마치야)


지붕 하나로 연결된 연립형 상가주택(장옥, 나가야)


구화신연쇄점과 구호남은행목포지점과 연결된 도로변의 은좌(銀座긴자) 간판. 이 일대가 번화한 상업거리였음을 말해준다.




"돈이 없고 경제가 안 돌아 예전에 살던 대로 살뿐인데 이걸 100년 전 모습이라고 문화재로 정했답니다." 붉은 벽돌 공장을 찾도록 도준 만호동 가게 주인의 말이다. 손모 국회의원 사건으로 한때 목포 근대거리 대단한 투기장으로 변한 양 매스컴을 탔지만 목포에 한 번이라도 와 본 사람이라면 이 또한 기우임을 알 것이다.


목포진 언덕길에서 내려다 본 적산가옥 거리(만호로 29번길)


소설가 박세회씨는 '목포에선 이상하게 눈물이 자주 흐른다'라고 목포 여행을 술회했다. 나 또한 거리를 다니는 내내 목포의 설움에 감정이입되었다. 목포는 출발은 부산과 비슷했으나 대도시로 발전한 부산과 달리 성장하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뒤쳐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1930년대 인구수로 3대항(부산, 인천, 목포) 6대도시(서울, 부산, 평양, 대구, 인천, 목포)에 이름을 올렸던 목포는 이제 '목포의 설움'을 딛고 '목포의 눈물'을 닦고 있다. 개항 1897 기치를 내걸고 근대 거리를 계속 다듬고 있는 중이다. 여수보다 통영보다 관광 면에서 늦깎이지만, 대신 '근대 도시'라는 자기만의 내공을 살려 색깔 있는 관광지로 거듭나길 응원한다.



 ※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등록문화재 제718호)

- 위 지도에서 찾기 어려운 곳 : 붉은벽돌창고(수강로12번길 23-6)


※ 같이 찾아보면 좋은 것들

1) 일본식 사찰 3곳 : 동본원사 목포별관(현 오거리문화관, 영산로75번길 5)

                           정광정혜원(노적봉길 26)

                           약사사(목포진길9번길 7-1)

2) 구 조선내화주식회사 목포공장(해안로57번길 28)

3) 구 목포세관(현 목포미식문화갤러리 해관1897, 해안로 179)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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