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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Nov 21. 2022

목포에 신사(神社)가 있었다고요?

목포 근대 거리를 걷다(2)

그들이 몰려왔다. 목포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목포는 항구라 그들이 맨 먼저 발 디조선 땅 중 하나였다. 그들은 목포에서도 기차역 가깝고 살기 좋은 터에 벚꽃을 심고 학교와 관공서를 세우며 은행과 상점을 열고 영화관과 유곽 거리까지 만들어놓고 '영원히 영화를 누릴 것처럼' 살았다.


그들에게 조선은 꿈의 땅이었. 동양척식회사가 선 곳곳으로의 이주를 정책적으로 지원해줬고 식민지 지배국 국민의 우월한 특권을 누리며 빠르게 부를 축적해갔다. 


이런 그들에게 종교가 빠질 수 없다. 세계 유례없는 국가 종교 신도(神道)의 상징인 신사(神社)도 거주지 주변에 세워졌다. 신사는 험난한 바다를 건너와 이국 타향을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고 결속을 단단하게 하는 울타리가 되었.


일본 신사에 관심이 있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신사는 일본인들이 믿는 종교 '신도(神道)'의 사당을 의미하고 신사는 두 종류로 나뉜다.(*출처 콩나물신문(http://www.kongnews.net 한도훈, 2018.11.19), 목포근대역사관1관 게시 자료)

신사(神社) :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모시는 사당. 태평양전쟁 이전까지 일본이 국교로 내세운 신도(神道)...우리나라에 세워진 신사(神社)는 조선총독부가 관여해서 건립. 해방 당시 82개소

신사(神祠) : 일반인들이 개인적인 신령을 모시고 있는 사당. 주로 조상신을 모심. 이것도 신도(神道)라고 함...우리나라에 세워진 신사(神祠)는 일본인 신자나 친일파를 포함한 일반인 신도 신자에 의해 건립. 해방 당시1,062개소


쌀과 면화, 소금의 삼백(三白)의 호남 최대 물류항이었던 목포에 돈도 돌았고 일본인 거주 비율도 적지 않았다. 일본인 거주지였던 만호동 일대에 남아있는 100년 전 상업가와 주택가가 번성했던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목포에도 신사(神社)가 있지 않았을까? 목포에서 신사(神社) 찾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운 좋게도 근대역사관에서 게시물을 훑어보다가 1930년대 목포 지도에서 '송도신사(松島神社)'라는 글자를 찾다. 흥분에 들뜬 것도 잠시뿐, 그게 다였다. 1930년대 지도는 지금의 지리(地理)를 말해주지 않았다. 송도라면 섬인데 목포에는 이제 송도라는 섬은 없다.


1930년대 목포 지도에서 찾은 송도신사(松島神社)(지도 출처 : 목포근대역사관(1관))


그래도 여기에서 포기할 순 없다. 송도는 예전 소나무가 많은 섬이었겠지만 주변이 매립되었다면 더 이상 섬이 아닐 테지. 폰의 지도 앱을 켜서 살피다가 '동명동 77계단'이란  찾았다. 신사가 있을 법한 지대 높은 곳은 이 일대여기뿐이다. 그렇다면 이 '동명동 77계단'이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일 수도?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도, 부산의 용두산신사도, 광주의 송정신사도 다 높은 곳에 있고 계단으로 올라가게 만들지 않았던가.


이제 현장 확인만 하면 된다. 다음날 찾은 '동명동 77계단' 입구에는 돌로 된 안내문이 있었다. '신사 계단'이라고 떡하니 명시되어 있는 것도 부족해 옛 신사 사진까지 있었다. 신사의 상징인 도리이가 뚜렷이 보이는 신사 계단 앞에서 목포중학교 학생들이 입학 기념 단체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송도신사(1911 설립)로 오르는 계단, 동명동 77계단


1943년 목포중학교 학생들의 입학기념 사진. 신사(神社) 상징인 도리이가 보인다.


송도신사(사진 출처 : 목포근대역사관(1관))


신사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해방 후 신사가 헐리고 집 없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바람을 막고 살았다. 좁고 불편한 골목, 낡고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과 폐가들이 공존한 언덕배기 마을이었고 목포시도 바다도 내려다 보였다. 계단 수가 정확히 77개였다. 신사 터에는 신사 건물 한 동이 남아있었고 지금은 누군가의 집이 되어 있었다. 마침 집 안에서 나오던 주인분을 만났다. 인사를 나누었더니 집을 보여주시겠다고 해서 따라 들어갔다. 놀랍게도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다다미방이 두 군데나 있었다.


신사 종무소로 쓰였다고 하는 신사 건물(왼)과 집 안의 다다미방(오)


*신사가 처음부터 개인의 집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송도신사는 해방 후 최마룡 씨에게 인수되어 현 상락교회의 전신인 동명동교회 건물로 쓰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참조 : 목포의 역사와 이야기 100선, 목포시 관광과)


일제 잔재 중 학교나 관공서 등의 건축물은 남아있는 도시가 많다. 그러나 신사는 상징성 때문이라도 잔존하기가 쉽지 않고 해방 당시 전국에 82개나 되었다는 신사(神社) 중 *건물이 까지 남아있는 예가 거의 없다.(*광주의 송정신사는 유일하게 건물 두 동이 남아있음.)


그래도 신사 건물 일부 계단이 남아있다는 데 목포 송도신사의 의의가 있다고 본다.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다.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면 물성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신사 터에 작은 나무 표지판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다. 앞으로 목포시에게 보존의 숙제를 넘긴다.


목포를 돌아다녀보니 목포의 근대 거리는 당시의 관공서와 상점, 주택, 공장과 창고가 다가 아니었다. 일본 불교 사찰도 세 군데나 그 형태도 온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 정광정혜원, 약사사가 그것들이다. 여기에 신사 참배와 요배를 강요하면서 우리의 정신과 종교까지 지배하려고 했던, 악랄했던 식민통치의 정점인 신사(神社)까지 일부 남아있으니 그야말로 목포는 일제강점기의 우리의 굴곡진 역사를 들여다보기 가장 좋은 도시가 아닐까.



일본식 사찰 3곳 : 동본원사 목포별관(현 오거리문화관, 영산로75번길 5)

                            정광정혜원(노적봉길 26)

                            약사사(목포진길9번길 7-1)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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