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식당에서 한국어로 적힌 메뉴를 보고 당황한 적이 있는가? 적어도 광주의 한 건물 벽에 붙은 '생비, 익비'란 두 글자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랬다. 한국 땅에서 반평생을 넘게 살아온 내게 듣보잡 메뉴라니. 여기에 한술 더 떠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어떤 음식인지 추측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좌절(?)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김치볶음밥, 된장찌개, 혹은 동태탕처럼 음식 재료와 조리 방식을 결합시킨 보통의 음식 이름 작명 공식에 완전히 벗어난 음식명이었다.
절대미문(絶對未聞)의 음식명 생비와 익비의 충격이 너무 강렬했나 보다. 광주 시내를 여행하는 동안 생각날 때마다 추측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환희에 차 스스로 '유레카'를 외쳤다. '그렇지. 비는 비빔밥의 약자이고 생비는 생나물비빔밥, 익비는 익힌나물비빔밥일거야. 비빔밥의 주재료가 나물이니 맛의 고장 전라도에서는 비빔밥도 생나물과 익힌나물로 구별해서 즐기겠지.'
나의 추정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주의 육회비빔밥 집에 가서야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생비와 육비는 육회비빔밥의 생고기 버전과 익힌 고기 버전이라는 것을.
목포 사람들이 육회비빕밥을 즐겨 먹는지 목포에서는 육회비빔밥만 취급하는 식당이 더러 있었다. 육회비빔밥 집에 가면 으레 생비와 육비를 물어 왔다. 생비는 양념하지 않은 쇠고기를 깍둑썰기해서 갖은 야채와 같이 나오고 육비는 양념이 되어 익혀 나온다. 생비 또한 참기름과 다진 마늘을 넣어 양념한 육회를 얹어 내는, 기존의 내가 알던 육회비빔밥이 아니었다. 목포의 생비는 생고기의 풍미와 씹는 맛으로 먹는 비빔밥이었다.
생비와 익비의 정체가 밝혀진 순간
육회비빔밥, 생비와 익비
무안에서 생비와 익비 사이를 넘나드는 비빔밥도 만났다. 바로 돌비. 돌솥비빔밥이 아닌 돌판비빔밥이었다. 첫눈에도 보는 사람의 눈을 미혹시키는 요리였다. 넓적한 검은 돌판 위에 쇠고기 육회와 여러 색색 야채가 동그랗게 펼쳐져 서빙된다. 쇠고기를 처음엔 생으로 시간이 갈수록 익힌 고기로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영리한 비빔밥이다.
돌판비빔밥(무안 산들수산)
생비와 익비의 또 다른 세계, 낙지비빔밥
목포에선 생비의 익비의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뻘낙지가 유명한 무안이 이웃인 데다가 워낙에 산낙지가 쉽게 공수되는 동네라 목포에선 낙지비빔밥도 생낙지와 익힌낙지로 취향대로 먹는다. 낙지 생비는 낙지탕탕이가 주인공인 음식이다. 이름만으로도 신나는 낙지탕탕이는 잘 썰어지지 않는 산낙지를 도마에 놓고 칼로 탕탕 내리쳐서 자른다는 데서 유래했다. 내륙 도시 출신인 나는 귀하디 귀한 국산 생낙지를 굳이 익혀 먹을 것 같지 않은데 낙지가 흔한 목포에선 이런 식으로 낙지 플렉스를 하고 있었다.
낙지비빔밥 생비와 익비
낙지비빕밥의 익비는 생낙지 자체를 데쳐 나물과 같이 담아 비빔밥으로 내온다. 어떤 곳은 낙지비빔밥의 생비와 익비의 가격이 같기도 하고 어떤 곳은 익비값이 조금 낮기도 했다. 기왕 익비를 먹는다면 생비와 가격이 같은 익비의 낙지가 더 신선할 것이라는 합리적 추정이 가능하다. 낙지초무침을 시키면 비빔밥으로도 같이 즐길 수 있는데 생비와 익비로 분류하자면 익비 카테고리에 속하고 익비의 응용판이라 볼 수 있다.
낙지초무침(무안 풍암회식당)
오로지 생비로만 즐기세요
목포에서는 단돈 일만 원에 무침회 한 접시와 밥과 생선찌개를 같이 내는 식당도 많이 만났다. 준치무침회 백반, 병어무침회 백반 등이다. 여기에 점심 값을 조금만 더 쓰면 간재미무침회도 가능한데 이들 식당도 하나같이 커다란 빈 대접을 같이 내왔다.
어떤 곳은 참기름만 한 숟가락 담은 채로, 어떤 곳은 참기름과 김가루를 첨가해서 나왔는데 한눈에 봐도 비빔밥 용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미 무침회에 갖은 야채가 들어있으므로 무침회를 밥과 한 대접에 넣고 비비면 생비가 완성된다. 준치무침회 생비, 병어무침회 생비, 간재미무침회 생비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병어무침회 백반
준치무침회 백반 간재미무침회
그래도 활어회 무침인데 처음부터 비벼 먹기는 아깝다. 그래서 나의 시식 전략은 '무침회 먼저, 비빔밥 나중'이다. 초반에는 무침회로 즐기다가 식사 중반쯤 대접에 옮겨 담고 밥과 같이 비빈다. 더할 나위 없는 생선회비빔밥이다. 당연히 생비로만 즐길 수 있다.
'한국은 비빔밥 문화'라는데 이토록 다양한 비빔밥이 가능한지 목포에서 처음 알았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야채가 주 재료이고 다져서 볶은 고기와 달걀지단이 고명인, 전형적인 비빔밥 그 너머의 세상이었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육회비빔밥과 어쩌다가 바닷가 관광지에서 먹어본 멍게비빔밥이 경험의 전부였던 나는 목포에서 클래스가 다른 비빔밥의 세계를 맛보았다.
목포가 대한민국 관광 4대 도시라고 한다. 한국관광공사가 서울과 제주에 편중된 관광 수요를 분산시키고자 공모를 통해 선정했고 국제관광거점도시로 부산이, 4대 지역관광거점도시로 강릉, 전주, 안동, 목포가 뽑혔다고 한다(2020년 1월). 목포가 관광도시로 뽑힌 데는 항구와 근대도시라는 관광 자원, 목포가 전라도 남단 여행의 거점이 된다는 점 외에도 목포의 싱싱한 해산물과 풍부한 먹거리가 주효하지 않았을까?
맛의 도시 목포로 가면 일행은 생비파와 익비파로 갈라질 것이다. 육회 식당이나 낙지 식당에 가서 현지인인 척 주문 넣어 보자. "저, 생비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