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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Jan 23. 2023

여행지에서 떡국 한 그릇

여행지에서 명절 나기

설날이다. 아무리 여행살이지만 그래도 명절인데 떡국 한 그릇은 식구끼리 같이 나눠 먹어야 '설을 쇠었다' 하지 않을까. 서울살이 5년 차 아들에게 한달살기 우리 숙소로 떡국 먹으러 오라고 했다. 떡국 먹으러 오면 세뱃돈 주겠다고 미끼도 던져두었으니 안 오면 저만 손해다. 부모가 자식 얼굴 한 번 보려면 이래야 되는 세상이라니ㅠㅠ


남편과 나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명절 청소를 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떡국과 곁들여 먹을 음식도 같이 준비한다. 메인 요리는 월남쌈이다.


사실 월남쌈은 '오늘의 수습요리'다. '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산다'는 오대수의 그 '수습'이다. 전날 청량리 시장에서 명절 장 분위기에 취해 장을 너무 많이 봐온 게 화근이었다. 돼지고기 2킬로, 가오리, 문어, 굴...  


압력솥으로 '돼지고기 무수분 찜'을 폼나게 해 보려다가 실패해서 몽땅 장조림을 만들었다. 작은 압력솥으로 네 차례나 고기를 삶아 댔으니 하루 종일 집 안에 돼지고기 냄새가 베였다. 살코기만 결대로 찢어 장조림을 완성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텁텁하다. 양도 너무 많아 소비가 걱정이다. 그래. 월남쌈을 하면 되겠다. 장조림을 월남쌈 속재료로 넣는 거다.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아 월남쌈을 만들었다. 재작년 박물관 대학 답사를 1년간 다니면서 주말마다 도시락을 같이 싸서인지 남편도 제법 잘 만든다. 월남쌈의 라이스페이퍼는 마법의 식재료다. 라이스페이퍼를 만들어낸 베트남 사람들은 천재다. 무슨 재료든 넣어서 말기만 하면 된다. 우리나라에 김밥이 있다면 베트남엔 월남쌈이 있다. 


월남쌈 말기


드디어 오늘의 명절 손님 아들이 왔다. 상을 차리려니 문제가 생겼다. 여행살림이라 2인용 식탁에 접의 의자가 2개뿐이다. 한 사람은 서서 먹는다? 두 사람이 먼저 먹고 한 사람은 나중에 먹는다? 셋이서 같이 먹는 방법은? 아들이 제안했다. 바닥에서 그냥 먹자고.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음식을 놓았다. 졸지에 실내 캠핑이다. 다행이다. 숟가락 젓가락은 세 벌이 있어서. 


 막상 차리고 보니 메뉴가 영 썰렁하다.

원래 내 머릿속의 상차림은 굴떡국, 월남쌈, 배추전, 문어숙회, 가오리찜, 생굴무침, 파김치, 나박김치였다.
실제 상차림은 굴떡국, 월남쌈, 가오리찜, 생굴무침, 파김치, 나박김치가 되었다.

문어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배추전은 번잡스러워 건너뛰었다. 그래도 떡국은 먹었으니 나이 한 살 더 먹는데 성공했다(?).


올해의 설 상차림


요양원에 계시는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남편, 나, 아들까지 전화기를 돌려가며 새해 인사를 했다. 멀리 있는 딸과도 영상통화를 했다. 이토록 조촐하고 조용하고 간편하기까지 한 명절은 처음이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친정이 없어졌다. 맏이인 내가 친정이 되었다. 10년을 그렇게 살았다. 명절이면 아버지와 동생 가족들이 우리 집으로 모여 얼굴 보는 게 명절 행사였는데 이제 아버지까지 안 계시고 내가 떠돌이 여행 생활을 하고 있으니 올해는 친정 행사도 생략이다. 언제 또 시끌벅적하게 지낼 명절이 있겠지.  


아들에게 싸 보낸 반찬(장조림, 월남쌈, 파김치)


아들을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면서 남편과 동네를 한 바퀴 걷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친정 가족이 내 정서의 뿌리였듯이 아들에게도 우리가 그런 존재였으면 좋겠다. 파김치 좋아하는 자취생 아들 손에 파김치 한 통을 들려 보냈다.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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