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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Jan 16. 2023

몇 개의 숫자를 맞혀야 내 집에 들어갈까?

서울에서 집 찾아가기

요즘 인터넷에서 본인 인증할 일이 흔하다. 대개 6자리의 숫자를 핸드폰으로 문자 전송해주고 웹 상에 입력하라고 한다. 인증을 한 번만에 성공하지 못하고 재인증 받는 경우가 두 번에 한 번 꼴이다. 다섯 자리는 그런대로 입력하는데 여섯 자리는 종종 실수가 생긴다. 한번에 6개의 숫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내 뇌의 처리 한계를 실감한다.


요즘 매일 낯선 곳을 다닌다. 매달 낯선 도시에서 살고 낯선 골목길을 걷고 낯선 숙소에서 잠을 잔다. 그렇다면 나의 정체는? 홈리스? 정처없는 떠돌이? 비슷하다. 일단 내가 사는 도시에 집이 없으므로 문자그대로 의미의 '홈리스'이기도 하고 최소한 갈 곳을 정해가며 옮겨살고 있으니 '정처있는 떠돌이'다. 이번 달은 서울에서 한달살기 여행 중이다.


한 달 단위로 집이 바뀌니 집 찾아가는 방법도 같은 주기로 달라진다. 6자리의 숫자 처리에 한계를 보이는 내가 매달 새로 바뀌는 집은 어떻게 찾아갈까?


며칠 전 양재동 고속터미널 부근에서 약속을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교통앱을 눌렀다. 가장 빠른 길 54분짜리가 검색되었다. '집 찾아가기' 미션을 통과해야 난 따뜻한 내 집에서 저녁도 먹을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다. 생존이 걸린 문제니 목숨 걸고 완수해야지!


먼저, 고속터미널역에서 도봉산행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상봉역에서 춘천행 경춘선으로 환승한 후 신내역 3번 출구로 나가라고 한다. 헉! 한꺼번에 뇌가 처리해야할 정보가 너무 많다. 00행 0호선과 갈아타는 전철명과 역 이름, 하차역 이름과 출구 번호까지. 서울에서 어딜 가든 '지하철 환승 한 번'은 가장 쉬운 길, 난이도 하에 속한다. '지하철 환승 한 번에 버스 환승 한 번'은 난이도 보통이다.


전철에서 내린 후 다음은 버스 260번이나 2114번을 타고 중랑경찰서 앞에서 하차하라고 한다. 서울의 지선 버스는 번호가 4자리나 된다. 역시 서울의 클래스다. 버스 정류장 이름 '중랑경찰서 앞'은 너무 쉬워 고맙다. 하남시에 사는 내 동생 집에 가려면 내려야 하는 버스 정류장 이름이 무려  '미사강변 리버스위트 칸타빌 리슈빌 정류장'이다. ㅎㅎ


서울 버스정류장에서. 5자리 버스 번호도 발견함.


버스에서 성공적으로 내렸다면 이제 미션의 중간 분수령은 넘었고 고지는 바로 저기다. 아파트 이름과 동과 호수를 기억해내야 한다. 000000 8단지 아파트 115동 1309호. 서울은 대단지 아파트가 많아 아파트 이름과 단지 수까지 따라오고 그 다음이 동과 호수이다.


핸드폰에 기록해 둔 동과 호수를 흘낏 봐가며 걷다가 아파트 동 앞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진짜 숫자 고문이 시작된다. 여기서 잠시 심호흡이 필요하다. 면접장에 들어서는 구직자 신세다. "제발 절 받아주세요."


암호를 대라!


아파트의 공동 출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를 차례다. 내가 사는 아파트 공동현관의 비번은 특수문자 포함 9자리다. 특수문자 1개+호수 4자리+비번 4자리. 다 누른 후 '어 잘못 눌렀나?'하는 생각이 들 때쯤 문이 열린다. 다행이다. 진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특수문자 포함 6자리를 눌렀다. 뭔가 경쾌한 기계음이 들렸다면 문은 열린거다. 딩동댕~


열려라 참깨!


주인이 자주 옮겨 다니니 나의 뇌도 주인의 발걸음만큼이나 바쁘다. 한 달 단위로 숙소 주소나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 찾아가는 법을 포함해 몇 세트의 비번을 다 새로 세팅하고 처리해야 한다.


드디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휴~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이 많은 이름과 숫자를 기억해내고 처리해서 무사히 집에 들어오다니 난 천재가 아닐까? 천재는 아닐지 몰라도 치매는 안 걸릴거야. 치매를 예방하려면 여행을 다녀라!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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