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차피 인생도 경유인걸

생활여행자의 세계여행, 프롤로그

by 위트립

내일은 3년의 공백을 뚫고 장거리 비행기를 타는 날이다. 긴 코로나 끝에 이런 날이 오기는 오는구나. 국제선 비행도 아직 실감 나지 않는데 거기에다가 직항 편이라니 이건 로또급 행운이 아닌가.

그동안 나의 '길지 않은 비행 인생'에 직항이란 단어가 존재하기는 했단 말인가. 남들과 함께 가는 한두 번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늘 경유 편 항공을 이용했다. 그런데 이번은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직항을 탄다. 보너스 항공편이라 내가 지불한 돈은 단돈 28,000원이다.

그동안 카드 실적(지금은 이 카드가 없어짐)으로 수년간 모은 델타항공 마일리지로 대한항공을 타고 가게 되었다. 어차피 '내 인생에 로또'는 기대하지 않으니 이렇게 나 스스로 '로또거리'를 만드는 삶도 나쁘지 않다.

모름지기 ‘직항’이란 집에서 출발해 공항에서 비행기 한 번이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는 지금 집 떠나온 지 4시간 만에 인천 운서역의 한 호텔에 와 있다. 이쯤 되면 '경유' 중에서도 중간 기착지에서 묵어가는 '스탑오버'다.

그렇다. 나는 비행기 탈 때마다 서러운 ‘대한민국의 지방러’이다. 웬만한 국제선은 다 인천에서 출발한다. 집에서 인천까지가 반나절거리인 지방 거주자는 비행기 타러 가는 길이 더 고역이다. 어떨 때는 2시간 비행을 위해 4시간을 리무진에 실려가기도 한다. 이런 설움을, 공항을 지척에 둔 서울 사람들은 알까.

꿈에도 그리던 직항을 끊고도 인천공항 경유 편으로 바뀐 나의 비행 일정은 다음과 같다.

대구-(기차 ktx)-서울역-인천 운서역 앞 호텔 숙박-인천공항-(대한항공)-프랑크푸르트


당연히 나도 집에서 인천공항으로 바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오전 11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려면 3시간 전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구에서 4시에 리무진을 타야 하고 집에서 3시쯤 나서야 한다. 그렇다면 잠은 언제 자나? 전날 밤 두세 시간 눈 붙이는 둥 마는 둥하고 새벽 내내 공항까지 내달려야 하고 3시간 수속을 거쳐 비행기를 타고도 14시간은 앉아 가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여행의 설렘만으로 위 일정을 고민 없이 소화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가 아니라 ‘내 나이가 문제’다. 50대 후반과 60대 초반인 우리의 장시간 비행엔 컨디션 관리가 최우선이다. 결국 전날 출발해 인천에서 하루 자고 가는 일정을 택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 코스도 이미 경유로 점철된 일정이다. 파리에서 미국의 파고(Fargo)에 가려고 하니 ‘파리-시카고-파고’행으로 가라고 검색 사이트가 알려주었다. 시카고행 비행 편을 검색하니 뉴욕 경유 편이 저렴하게 나왔다. 뉴욕과 시카고를 경유할 거면 아예 그 도시에서 며칠 머무는 게 좋을 것 같아 항공편을 잘라 끊었다. 이른바 ‘경유한 김에 놀다 가기’다. 파리-뉴욕(4박)-시카고(4박)-파고. 은퇴 후 시간부자인 우리는 기꺼이 시간을 더 쓰면서 다니기로 했다.

인천 호텔에 짐을 내리고 저녁을 사 먹고 왔다. 단돈 1만 원에 돌솥밥에 고등어구이까지 나오는 순두부 정식이었다. 먼 길 떠나기 전 마지막 출국 식사로 만족스러웠고 숙소도 쾌적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한 경유지 인천에서의 하룻밤 여행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번 장기여행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다.

북창동순두부_수정.jpg
호텔투어인천공항호텔&스위트_수정.jpg
인천공항 가기 전, 인천 운서역에서의 하룻밤. 잘 먹이고 잘 재워준 나의 첫번째 경유지


어쩌면 이렇게 끊어가는 여행이 더 여행다운 건지도 모른다. 과연 직통으로 빨리빨리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딱히 따로 있을까 싶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우리 집이다.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경유지를 반복적으로 추가해 가는 게 여행이다.


이제부터는 상황 닿는 대로 천천히 지구 위를 유랑해보고 싶다. 그래서 편도 티켓만 끊고 언젠가 돌아올 목적지 내 집을 향해 비상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내 삶도 무엇이 진짜 목적인 지 모른 채 ‘그때그때 선택하고 머무르고 움직이고’를 반복해서 여기까지 왔다. 어차피 인생도 경유인걸.



10개월 정도의 일정으로 떠납니다. 유럽-미국-중미-남미 순으로. 생활여행자의 시선으로 여행을 담아보려고 합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