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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액젓을 기내에 갖고 탄다고요?

by 위트립

오 마이 멸치젓!


공항에 도착했다. 폰을 열어 항공사에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체크인과 수화물 위탁을 셀프로 하라는 안내였다. 빳빳한 종이 탑승권을 들고 보딩을 기다리던 아날로그 감성은 이제 공항에서 사라지는 것인가.


나와 남편의 짐은 8Kg와 12Kg의 각자 배낭과 독일의 딸아이에게 전해줄 물품이 든 작은 손가방이 전부다. 무인키오스크 화면을 꾹꾹 눌러 각자의 배낭을 부치고 나서 손가방을 추가로 부치려고 하니 수화물 규정이 '1인당 23kg 짐 1개'라서 안된다고 했다. 짐 무게에만 신경 쓰다가 짐 개수를 놓쳤다. 관계없다. 애초에 부치려고 했던 아이 짐은 기내에 갖고 타면 되니까.


짐을 부치고 나니 내심 뿌듯하다. 키오스크 앞에서의 처음의 당혹감은 사라지고 나 자신이 젊은 친구들 못지않게 디지털 세계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중년임을 인증받은 기분이 들었다. 성취감도 잠시, 출국장에 들어서려는 순간 내 뇌가 그제야 정상 작동되기 시작했다. ‘오 마이 멸치젓!’

가뿐하게 기내에 갖고 타려고 했던 가방 속에 문제의 액체, 멸치액젓 한 병이 있다는 걸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여행 짐에 웬 멸치액젓? 프랑크푸르트에서 지내는 아이에게 김치라도 담아주려고 고춧가루와 멸치액젓을 한 통 챙긴 게 화근이 될 줄이야.



멸치액젓 기내 반입 작전


기내 휴대 액체 제한인 100mL를 훨씬 초과하는 800g짜리 멸치액젓 한 병을 어떻게 한다? 방금 부친 배낭을 되돌릴 수 있다면 수화물 짐에 넣어 다시 부치면 된다. 직원에게 쫓아가서 사정해 보았다. "방금 수화물 부친 사람인데요. 짐을 다시 주실 수 있나요?" 짐이 이미 이동 벨트로 옮겨져 안된다고 했다. 추가 경비를 내고 짐을 부쳐야 하고 비용이 13만 원이라고 한다.


고작 6,000원짜리 멸치액젓 한 병을 위해 13만 원을 지불할 순 없잖아. 과감히 버리고 탄다? 그래도 너무 아깝다. 통째로 버리기에는. 순간 내 눈앞에 공항에 입점한 약국이 보였다. 그래 그 방법이 있겠다. 약국으로 쫓아가 100mL 빈 약병을 개당 500원을 주고 8개 샀다. 멸치액젓을 나눠 담았다. '기내 액체 반입은 용기 100mL 이하에 내용물 100mL 이하, 총 1리터까지' 규정 완벽 준수다. 인천공항 의자에 빈 약병을 늘어 세워두고 멸치액젓을 나눠 담는 중년 아줌마를 상상해 보라.


멸치액젓_수정.jpg 지금 보니 800g의 666mL 멸치액젓이다. 약병 7개면 충분했네.


고추장 NO, 고춧가루 YES


그래서 보안검색대는 무사히 통과했을까? 검색 기계에서 짐이 나오자 검색요원이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걱정했던 멸치액젓은 무사히 통과했다. 뽁뽁이로 감싼 게 뭐냐고 물었다. 고춧가루라고 하니 고추장은 안된다면서 고추장인지 고춧가루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포장을 뜯는다. 겹겹이 싼 완충재 안의 내용물이 고춧가루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마침내 통과 승인이 났다. 휴~


이렇게 해서 멸치액젓과 고춧가루는 인천에서 목적지까지 14시간 기내 비행을 허락받았다. 과연 프랑크푸르트에서 김치 담기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 있을까?




10개월 정도의 일정으로 떠납니다. 유럽-미국-중미-남미 순으로. 생활여행자의 시선으로 여행을 담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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