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퇴근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다. 남편과 둘이서 딸아이 사는 동네를 산책하기로 했다. 아이가 사는 곳이 프랑크푸르트대학 근처다. 대학은 어디든 낭만 가득하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엔 왜 몰랐을까. 대학교 교정에 봄꽃도 피고 나무 새순도 돋았다. 캠퍼스의 봄은 아름답다. 봄 그 자체만으로도 화사한데 인생의 봄 청춘들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으니 오죽할까.
프랑크푸르트대학 캠퍼스
캠퍼스 안에 카페가 보였다. 이국의 캠퍼스 커피는 무슨 맛일까? 매점에서 커피 두 잔을 시키니 코인 2개를 주길래 받았다. 이게 뭘까? 대학 안에서만 쓰는 학교 화폐 같은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매점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코인 1개가 1유로라고 한다. 어차피 이 코인은 밖에서는 쓸 수 없을 테니 구내매점에서 써 없애기로 했다. 코인을 주고 빵을 집으니 커피잔을 갖고 오란다. 아하~ 코인은 바로 머그잔 보증금이었다. 커피잔과 코인을 주고 2유로를 돌려받아 나오니 아이와 만날 시간이 다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대학 구내 카페에서
아이는 독일에 취업한 지 일 년이 채 안되었다.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 프랑스, 한국 국적의 여자 셋이 각각 방 1개씩 쓰면서 욕실과 주방을 공동으로 쓰는 구조라고 한다. 한국은 원룸이라도 주방과 욕실을 갖춘 걸 기본으로 하고 있어 독일의 셰어하우스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배추 두 통과 마늘과 생강을 사서 아이 집으로 갔다. 고춧가루와 멸치액젓은 한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기내 반입에 성공, 공수해 갔으니, 김치 재료는 다 있다. 배추를 절이거나 버무릴 큰 용기(用器)가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큰 스테인리스 냄비가 몇 개나 있었다.
배추는 마트에서 차이나콜(Chinacohl)이란 이름으로 팔았는데 생김새도 맛도 한국 배추와 똑같았다. 배추를 잘라 소금을 켜켜이 뿌려 절였다. 한 번도 김치를 담가보지 않은 아이는 '절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생배추가 소금에 숨이 죽는 걸 직접 보더니 이제야 '아하!'를 남발한다. 필요는 빠른 학습을 낳는 법. 마늘과 생강을 다지고 고춧가루와 젓갈을 넣어 김치 양념 만드는 법까지 진도를 나갔다. 시뻘건 김치양념에 배추를 버무려 담으니 제법 먹음직해 보였다.
자취집 주방에서 김치 담그기
남은 김치 양념은 소분해 냉동보관하도록 일러두었다. 아이도 배추를 절이고 버무리는 걸 거들더니 혼자서도 할 수 있겠다고 한다. 현명한 부모는 자식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 하는데 바쁘게 살다 보니 그럴 새가 없었다. 이제라도 여행길에 들러 속성으로 전수할 수 있어 다행이다.
주된 과업인 김치 담그기가 끝나고 나니 그제야 아이가 사는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주방과 욕실은 좁지만 쓰기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아쉬운 점은 공용 공간으로 소파 놓인 거실은 커녕 식탁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 음식을 해서 각자 자기 방에 갖고 가서 먹는다고 한다. 이런 방 한 개의 월세가 무려 700유로니 한국돈으로 100만 원이다. 지금은 훨씬 더 올라서 이마저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서울이 비싸다, 비싸다 해도 그래도 서울이 제일 싸다'더니 진짜 그렇다.
좁은 복도 양쪽으로 방 3개, 주방 1개, 욕실 1개가 붙어 있는 구조(왼) & 아이의 방(오)
집주인은 개인이 아니라 임대주택회사라고 한다. 일정한 공간으로 최대한 이윤을 내기 위해 거실 공간을 없애고 방으로 개조한 것 같았다. 유럽식 낭만이 철철 흐르는 예쁜 외관 건물에 이런 가슴 짠한 리얼리즘이 숨어있을 줄이야. 사람 많이 몰리는 대도시에서 사람 살기 팍팍한 건 세계 어디든 다 똑같은가 보다.
프랑크푸르트 주택가
한국이든 독일이든 청춘은 고달프다. 월급 받아 쪼개서 월세내고 생활비 쓰고... 그래도 청춘은 청춘이다. 아이는 5월 휴가 때 친구들과 모로코로 여행 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래, 누려라. 지금의 젊음을!
비록 엄마 아빠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이제 김치는 언제든 네 곁에 둘 수 있잖아. 네가 좋아하는 '미역국에 김치' 한 끼면 새 기운을 얻겠지. 우린 이제 아이와 작별하고 베를린으로 간다.
아이가 미역국과 김치로 차린 밥상 사진을 보내왔다.
10개월의 일정으로 떠납니다. 유럽-미국-중미-남미 순으로. 생활여행자의 시선으로 여행을 담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