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람들은 독일 음식을 사 먹지 않는다고 한다. 독일에서 지내는 딸아이에게 들은 말이다. 거리에서 눈만 돌리면 한식당 간판을 찾을 수 있는 나라,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 나는 수긍이 되지 않는다. 독일 사람들이 독일 음식을 안 먹으면 뭘 먹나?
난 한국에서 쌀국수와 마라탕을 사 먹지 않는다. 언젠가 먹어본 한국 식당에서의 베트남 쌀국수는 하노이에서 먹던 맛에 비해 견줄 수가 없었고 서울에서 사 먹은 마라탕은 청두와 충칭의 마오차이와 훠궈의 흉내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후 '현지 음식은 현지에서 먹어야 한다'가 나의 지론이 되었다.
그러니 독일에 왔으니 독일 음식을 먹어야지. 그런데 이게 웬일?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독일 음식점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거리에는 스시집, 인도음식점, 터키음식점, 타이음식점, 지중해음식점, 이탈리아음식점들이 성업 중이었다.
독일 인구의 20%가 이민자 출신이라더니 독일 대도시 전체가 마치 세계 음식의 경연장이라도 된 듯했다. 이러니 독일 사람들이자기 도시에서 세계 요리를 사 먹는구나. 이래서 나온 말이 '독일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는 다른 나라 음식'이란 말인가?
무작정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독일음식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검색을 했다.예전엔 구글 없이 어떻게 밥을 먹었을까. 어렵사리 찾은 독일음식점에서 슈바인스학세(Schweinshaxe)를 주문했다.
곧이어 세상에서 가장 전투적인 요리 한 접시가 내 앞에 놓였다. 어른 주먹 두 개는 될만한 큼지막한 돼지고기 덩어리 가운데 나이프를 수직으로 내리꽂은 채 나온 요리는 독일식 족발 요리로 알려진 슈바인스학세였다.
슈바인스학세와 사우어크라우트
바싹한 겉은 고소했고 속은 연하고 식감이 좋았다. 돼지고기를 맥주와 각종 향신료 넣은 물에 오래 삶은 후 다시 오븐에 구워낸다고 한다. 우리나라 족발 요리와 달리 정강이까지 재료로 쓴다고 한다. 전투적인 비주얼만큼이나먹는 방법도 전투적이었다. 나이프와 포크가 바빴다. 한국 족발을 덩어리째로 받아 접시에서 손수 살코기를 발라먹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래도 고기는 부드러워 나이프만 닿아도 결대로 찢어졌다.
슈바인학세를 먹는 과정
프랑크소시지의 고향 프랑크푸르트에서 원조 소시지를 안 먹어볼 수 없어 소시지메뉴도 시켰다. 브랏부어스트(Bratwurst)는 그릴에 구운 소시지라는 뜻이니 요리랄 것도 없어 보이는데 접시에 그럴듯하게 담겨 나왔다. 뮌헨에는 송아지고기로 만들어 물에 데쳐먹는 바이스부어스트(Weißwurst)를 즐기고 베를린에는 노란 카레 가루를 뿌려 먹는 커리부어스트(Currywurst)가 명물이라고 한다.
구운 소시지 브랏부어스트와 사우어크라우트
슈바인스학세와 부어스트 둘 다 맥주와 잘 어울리는 요리였다. 그런데 이 둘보다 나의 관심을 끈 음식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두 요리에 공통으로 곁들여 나온 양배추절임이었다. 독일식 양배추김치로 불리는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였다. 생으로도 먹고 볶아서도 먹는다는데 익혀 나왔다. 주된 맛 새콤함에 달콤 짭짜름함이 더해졌고 아싹하게 씹힌다.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 주어 나도 모르게계속 먹게 되는 중독성이 있었다.
하루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갈 때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집 앞 마트에 들렀다. 마트 한 바퀴 돌면서 아침용 빵과 과일 몇 개 사는 게 고작이었지만 타국의 마트에서 현지인 틈에 섞여 장 보는 흉내를 내는 게 어떤 관광보다 재미있었다.
관찰은 발견을 낳는다. 마트에서 사우어크라우트를 찾았다. 한 병 사서 독일인처럼 사우어크라우트를 곁들여 아침상을 차려본다. 익히지 않은 생 사우어크라우트는 신맛이 강했다. 고기 위주의 서양 식사에서김치가 그리운 여행자에게 딱좋은 대체재다.
슈퍼마켓에서 시판되는 사우어크라우트 완제품(680g 2.2유로, 한화3,200원)
쌀국수를 끓여 사우어크라우트와 곁들인 여행지 밥상
하긴 양배추가 달리 양배추랴. 이름 그대로 서양배추다. 한국 사람들이 배추로 김치 담가 먹는 것처럼 독일 사람들도 자기네 배추로 자기네 김치를 담가먹네. 돼지수육엔 김치, 슈바인스학세엔 사우어크라우트! 우리와다른 듯 비슷한 것을 찾고 보니 독일 여행이 만만해진다.
10개월의 일정으로 떠납니다. 유럽-미국-중미-남미 순으로. 생활여행자의 시선으로 여행을 담아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