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열쇠함 셀프체크인이라고 했다. 건물 입구에서 숙소 주인이 알려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니 건물 문이 열렸다.
체코 프라하 숙소의 공동현관 입구
계단을 올라 숙소 현관 앞에 도착했다. 주인이 알려준 비번은 2개. 아무리 봐도 두 번째 비번을 누를만한 디지털 도어가 없다. 문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벽에 작은 박스가 보였다. 뚜껑은 손만 갖다대니 열렸고 그 안에서 번호자물쇠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두 번째 비번의 사용처는 여긴가? 혹시나 하며 번호를 돌려 맞추자 거짓말처럼 열렸고 열쇠가 들어있었다. 아하~ 열쇠함을 이용한 셀프체크인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프라하 숙소의 열쇠함을 이용한 셀프 체크인
유럽 5개국을 한 달 반 동안 여행하면서 줄곧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다.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 프라하, 더블린, 런던, 파리와 디종, 리옹, 아비뇽, 니스까지.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을 묵었던 13곳의 숙소 중 디지털도어만으로 출입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고 모두 열쇠를 이용했다.
열쇠는 대체로 2개. 공동현관과 집 현관. 그러나 공동현관이 이중으로 되어있거나 공동주택의 쓰레기실 열쇠까지 추가되면 3개가 되기도 했다.
여행 중 내가 모시고 다녔던 아비뇽과 파리 숙소의 열쇠들
에어비앤비 숙소를 이용하는 동안 열쇠 시집살이를 했다. 그나마 열쇠를 열쇠함을 이용해 셀프로 받을 수 있게 해 주면 고마웠다. 주인들은 대부분 게스트를 직접 만나 열쇠를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는 걸 선호했다. 이것은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현지인과 사전 약속을 해서 시간에 맞춰 만나야 함을 의미했고 공항에서 숙소도 겨우 찾아갈까 말까 한 대중교통이 익숙치 않는 외국 여행자에게 꽤나 난이도 높은 미션이었다.
그뿐인가. 열쇠를 돌려 문을 여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 집집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익혀야 했다. 열쇠를 돌려 문을 여는 건 언제나 스트레스였고 문 여는 게 손에 익었다 싶으면 숙소를 떠날 때였다.
숙소에서 나갈 때는 언제나 열쇠를 소중히 모셔고 다녀야 했다. 아니 목숨처럼 여겨야 했다. 이는 여행자가 어떤 순간에서도 사수해야 하는 3종 세트(여권, 지갑, 핸드폰)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음을 의미한다. 여행 기간 내내 열쇠 셔틀을 했다. 수시로 열쇠가 주머니에 잘 들어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무시무시한 유럽의 열쇠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더더욱 그랬다.
유럽 열쇠 괴담을 누설하면 이렇다. 만약의 경우 내가 숙소 열쇠 세트 2개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일단 그 집의 잠금장치 교체 비용과 열쇠값을 물어내야 한다. 또 공동 현관의 열쇠 시스템도 통째로 갈아야 하고 같은 현관을 쓰는 모든 세대의 열쇠를 다 새로 맞춰줘야 한다. 열쇠 2개를 잃어버리면 장비값에 유럽의 비싼 인건비까지 더해 우리 돈으로 수백만 원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생긴 게 열쇠 보험(Key Insurance)이고 실제로 현지인들은 열쇠 보험에 가입한다고 한다.
체크인 전 리옹 숙소의 주인에게 받은 메시지, 이쯤 되면 괴담은 실화가 된다.
디지털도어록 아닌 집을 찾기 어려운 한국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디지털의 맛을 알고 나면 아날로그는 너무 불편해진다. 한국의 우리 동네에 '오박사 열쇠'라는 열쇠 가게가 있다. 난 그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요즘 '누가 열쇠를 맞출까? 저 가게 사장님은 어떻게 먹고살까?' 늘 염려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의 솜씨 좋은 열쇠공들은 수요가 많은 유럽으로 가야 하나? 아니면 유럽에서 디지털도어록 장사를 해야 하나?
파리 거리에서 만난 열쇠 가게
니스의 숙소를 나오면서 주인이 일러준 대로 열쇠 세트를 우편함에 던져 넣고 나왔다. 순간 홀가분하면서도 짜릿하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세대수를 헤아려본다. '휴~ 만약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물어줘야 할 집은 스물다섯 곳!'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 일이 안 생겨서 다행이야. 오늘도 무사히 여행지의 하루가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