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현지 언어를 배워보는 건 나의 오래된 꿈이었다. 오늘 그 꿈의 첫날을 보냈다. 오늘 처음으로 스페인어 학원에 갔다.
과나후아토대학과 사설 어학원 두 군데를 염두에 두고 답사를 위해 숙소를 나서는 참이었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어학원 입구에서 학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 어학원은 집에서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시킨 곳이었다. 골목이 예쁜 과나후아토에서 등하원하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미국 덴버에서 온 존이라고 했다. 존도 오늘이 첫날이고 온라인으로 사전 등록을 하고 왔다고 했다.
스페인어 학원(La Hacienda Spanish School) 입구
인사만 나누고 지나가려는 참이었는데 마침 학원 관계자가 와서 문을 열어주었다.학원 시설도 보고 상담도 받을 겸 존을 따라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레벨 테스트를 받고 수업으로 이어져 버렸다. 그렇게 나의 스페인어 학원이 결정되었다.
반 배치 고사를 쳤어요~ 담당 교사와 개인별 시간표가 배정되었다.
학원은 넓은 정원을 갖춘 아름다운 식민지풍 건물이었다. 숙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있다. 주 단위로 등록이 가능하고, 비용도 그룹 수업(2~5명) 주 15시간에 100달러(미국달러)면 괜찮은 가격이다. 미리 조사해 본 과나후아토 어학원은 대체로 이런 가격대였다.
어학원 건물이 이렇게 멋있어도 되나? 평화와 힐링 그 자체의 공간이었다. 건물 내부도 뜰도.
미국인 캐시와 나 둘이서 수업받았던 강의실
수업은 오전 9시부터 3시간을 받는다. 1교시는 문법, 2교시는 어휘와 표현, 3교시는 회화 수업이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된다. 그룹 수업이라지만 초보반 수강생은 미국 여자 캐시와 나 둘 뿐이다. 수강생들은 전체 20여 명쯤 되고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들이었다. 유럽인 한 둘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미국 사람들이었다. '어디에서 왔느냐'라고 물으면,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몬타나...'라고 대답하는 미국인들 말이다.
수업이 끝나고 학원을 나서면 거리는 실습 현장이 된다.
스페인어 실습 1
버스를 탔는데 다들 앉아있고 나만 서 있었다. 이 동네에서 흔하지 않은 동양인이라 그런지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돈데(Donde) 어쩌고 저쩌고라고 물어왔다. '어디서 왔냐고 묻는 건가?' "한국에서 왔는데요.(Soy de Corea.)"라고 대답했다. 또 묻는다. '아, 어디 가냐라고 물었구나.' "엠바하도라스 가요.(Voy a Embajadoras.)"라고 하니 엄지 척을 해준다. 버스를 맞게 잘 탔다는 뜻이다. 어디 출신인지, 어디 가는 지를 묻는 것도 구분 못한 왕초보의 첫 실습이었다.
스페인어 실습 2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식료품점에 들렀다. 고추 다대기 반찬을 만들어 보려고 안 매운 고추를 고르고 있었다. 멕시코 고추는 어찌나 매운지 한국에서 매운 것 좀 먹는다고 자부하는 나도 완전히 항복했다.
야채칸에 진열된 고추를 종류대로 하나씩 갖고 가서 점원에게 물었다. "노 삐깐떼?(No picante?, (어떤 게) 안 매워요?)" 안 매운 고추는 없다고 한다. 아주머니 손님 한 분이 내 손에 든 4개의 고추 중 가장 작은 걸 가리키며 "마스 삐깐떼"라고 일러주고 갔다. '이게 가장 덜 맵다는 뜻이구나.' 가장 작은 고추를 한 봉지 사 왔다.
어떤 게 안 매워요? 안 매운 고추는 없단다.
숙소에 와서 고추를 썰다가 다지기는 커녕 한 개도 채 못 썰고 바로 멈췄다. 매운 향이 주방에 가득 찼다. 가장 덜 매운 게 이 정도? 아~ 그제야 깨달았다. 마스가 '덜 맵다'는 뜻이 아니라 '더 맵다'는 뜻이었구나. 아주머니는 안 매운 고추를 찾는 내 의도는 모른 채 4개의 고추 중 가장 매운 것을 가르쳐 주고 갔는데 나는 마스(mas)를 '덜하다(menos)'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마스(mas)는 '덜하다(less)'가 아니라 '더하다(more)'란 뜻이다.
오늘의 실습 결과를 점수로 매기면 30점쯤 되겠다. '어디 출신이냐, 어디로 가느냐'의 기본 문장도 구분 못하고 기초 중의 기초 단어 마스(mas)도 혼동했던 하루였다.
내 나이 50대 후반. 내 모국어도 평소 잘 아는 단어가 한 번만에 출력이 안 되는 나이다. 새로운 용어는 한 번 들어서는 절대로 입력되지 않는 나이다. 이 나이에 외국어라니!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멕시코 산골의 동화 같은 마을 과나후아토에서 현지인처럼 주 5일을 매일같이 어딘가로 다닌다는 게 너무 설레니까. 현지어 한 마디 할 줄 알면 여행이 더 재미있어진다. 나 같은 은퇴 여행자에게, 외국어는 시험도 없고 생존도 걸리지 않는다. 느리게 가도 되고 즐기면서 배우면 된다.
내 나이가 어때서? 여행하기 딱 좋은 나이, 외국어 배우기 딱 좋은 나이, '여행하며 외국어 배우기' 딱 좋은 나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