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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지에서 어학원을 다녀보니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 스페인어 수강 후기

by 위트립

은퇴한 지 2년이 넘었다. 작년엔 우리나라 도시 곳곳을 '한달살이'하며 돌아다녔다. 일상이 여행으로 채워진 날들이 올해는 해외에서 이어지고 있다.


돌아다니는 건 여전히 재미있고 호기심도 넘친다. 하지만 여행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곳 멕시코 과나후아토에서 한 달간 체류하고 있다. 그냥 체류도 좋지만 벼르던 외국어 공부를 현지에서 해보고 싶어 스페인어 어학원에 등록했다. 여행지에서 어학원을 다녀보니...



주말 있는 삶이 생기더라


스페인어 학원 다니는 일이 하루 중 주된 일이다. 덕분에 주말이 생겼다.


은퇴자는 아니 여행자는 주말이 없다. 평생을 주 단위로 잘라 살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없어진 삶이라니. 요즘은 이번 주말엔 뭐 할까 구상하면서 주말을 기다리며 지낸다. 평일은 평일이라 좋고 주말은 주말이라 더 좋다. 특정 날에 생기를 불어넣고 악센트를 준다. 밋밋했던 일주일에 굴곡이 생기니 여행 권태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다.



조금은 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나의 스페인어 클래스메이트는 미국인이다. 이곳 수강생은 나와 노르웨이 할아버지 한 명 외엔 모두 미국 여행자들이다. 영어가 모국어인 그들과 이야기하면 늘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십수 년을 배워도 '잘 못하는 영어'가 종종 스트레스이고, 아직도 내게 영어는 '잘하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인들과 같이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를 배우니 이제야 평평한 운동장에서 같이 뛰고 있는 기분이다. 평소에도 모국어로 살면서 모국어로 남의 나라를 여행하는 영어권 사람들이 부럽다 못해 은근히 얄미웠는데, 그들이 낯선 언어로 문장을 만들어내느라 머리를 쥐어짜며 버벅대는 모습을 보니 고소하다. '너희들도 겪어봐. 외국어가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비록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지만 영어라고 해봐야 설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니 때때로 좀 놓쳐도 스페인어 내용으로 커버가 되었다. 한 번은 'sollozar(소요사르)'라는 단어가 나와서 옆 자리 캐시가 뜻을 물었다. 물론 나도 모르는 단어였다. 선생님이 영어로 'to sob'라고 대답하니 캐시는 고개를 끄덕인다. 반면에 나는 '그럼, 'sob'는 무슨 뜻이야?' 영어사전을 찾아야 했다. '흐느끼다'라는 뜻이다. 캐시보다 한 단계를 더 가야 했다. '어? 이러면 내가 불리하잖아?' 완전히 평평해진 운동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극복해야지.


강의실에서



수강료는 언제 내나요?


어학원에 처음 갔을 때 레벨 테스트를 받고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수강료를 물어보니 내가 받는 그룹 수업은 주 15시간에 미화 100달러라고 한다. 돈은 언제 내냐고 물었더니 "Don't worry!"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어학원에서는 내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여권도 보자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주말이 지나고 두 번째 주가 다 되도록 돈 내라는 소리를 안 한다. '만약 이러다가 내가 아프거나 무슨 사정이 생겨 학원을 못 가면 그들은 수강료를 떼이는 것 아닌가' 수강생인 내가 대신 걱정해 준다. 목요일이 되자 운영자 루이스가 작은 쪽지를 건네주었다. 2주 치 수강료 청구서였다. 돈 내라는 고지서가 이렇게 반갑기는 난생처음이다.


2주 단위로 받은 후불 수강료 청구서(주 15시간 기준)


셋째 주부터 새 클래스메이트가 된 샌프란시스코 출신 브리아나가 쉬는 시간에 내게 물어왔다. "돈 냈어? 왜 돈을 안 받아?" 둘이 웃으면서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돈을 내야 학원 수강이 시작된다고 했다. 브리아나가 말하기를, "여긴 사람을 믿나 봐." 그렇다. 여긴 미국이나 한국과 다르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아무 문제없어 보이고 일상은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여긴 과나후아토니까.


지름길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한 달간 배워 스페인어를 얼마나 잘하느냐고요? 생각해 보자. 십수년전 학교 때 문법 좀 익힌 사람이 미국에 가서 영어 말하기를 한 달간 배웠다고 하자. 한 달 후에 그가 영어를 얼마나 잘 구사할까?


내 경우, 기본 문법책은 한국에서 떼고 왔고 숫자와 기초 단어는 사전 학습이 된 상태였지만 한 달 만에 말이 눈에 띄게 늘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한 두 마디 알아들은 날은 뛸 듯이 기쁘다가 잘 아는 단어조차 헤맨 날은 좌절하기도 했다. 현지 어학원에도 학생의 수준과 요구에 맞게 잘 가르치는 강사도 있고 시간만 때우는 강사도 있었다. 이 또한 세계 어디든 똑같다. 지름길은 어디에도 없다. 끊임없는 관심과 연습만이 나를 '다른 세계와 통하는 문'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강의실에서 내려다본 어학원(La Hacienda Spanish School) 가든 뷰


오늘은 식료품점에 가서 진열대에서 브로콜리를 찾았다.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브로콜리라는 단어도 모르겠다. 닥치는대로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No Hay brocoli?(브로콜리 없어요?)"

"Abajo de zanahoria."

헉~ 나도 모르게 알아들어버렸다('당근 밑에 있대.') 신기하고도 기특했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아바호 데 사나오리아'를 중얼거렸다. 설마 이렇게 익힌 것도 잊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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