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식탁일기(21) - 칠레
파리에는 바게트의 시간이 있었다. 프랑스 여행을 했던 올 4월, 해질 무렵만 되면 파리지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다란 바게트를 한 개씩 안고 귀가하곤 했다.
멕시코에서는 토르티야의 시간이 있었다. 과나후아토에서 한 달을 지냈는데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동네 토르티야 가게 앞에 토르티야를 사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한 사람이 보통 수십 장씩 사가곤 했다.
밥을 안 먹고사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이렇게 많다는 것을 여행을 떠나와서 처음 알았다. 어떤 사람들은 밀을, 어떤 사람들은 옥수수를 주로 먹는다. 이는 곧 여행자인 나도 어떤 나라에서는 밀을, 어떤 나라에서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아야 함을 의미했다.
라틴 아메리카는 옥수수의 원조 대륙이다. 이곳에서 유럽으로, 아시아로 옥수수가 건너갔다고 한다. 멕시코와 과테말라에서 번성했던 마야 문명에는 옥수수신이 있었고 여러 신들 중 최고의 신으로 섬겼다. 심지어 고대 왕들이 자신을 옥수수신과 동일시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두개골을 변형시켜 옥수수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고대 벽화에 옥수수 머리 왕족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변형된 두개골이 출토된 적도 있다고 한다. 마추픽추와 쿠스코에서 만났던 잉카 문명도 풍부한 옥수수 생산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옥수수를 많이 먹었다. 음식 이름도 같거나 비슷한 것이 많았고 옥수수를 먹는 방식도 같거나 비슷한 듯 다른 점도 있었다.
멕시코는 진정 토르티야의 나라였다. 아침은 토르티야를 잘게 잘라 구운 것을 양파채와 고수, 치즈를 뿌려 먹고 점심이나 저녁에는 식당에서 길에서 타코를 먹는다. 식당에서 어떤 요리를 시켜도 토르티야가 무제한 제공된다. 과테말라에서도 토르티야는 매 끼니 상에 올라왔다.
콜롬비아에서는 하얗고 납작한 것이 메뉴마다 곁들여 나왔다. 밀로 만든 빵도 아니고 쌀로 만든 떡도 아니다. 토르티야 재료와는 다른 종류의 옥수수로 만든다고 하고 식감은 토르티야보다 부드러웠다. 이름은 '아레파(Arepa)'였다. 토르티야가 음식을 넣어 쌈처럼 싸서 먹는 얇은 전병이라면 아레파는 그 자체로 뜯어먹는 음식이었다.
나라 이름조차 적도인 에콰도르에서 적도선을 안 밟아볼 수 없었다. 위도 0도 선에 세운 적도기념관에 가다가 바로 앞 식당을 들렀는데 옥수수가 통째로 접시 위에 나왔다. 내가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페루 세비체에도 옥수수 삶은 알맹이와 볶은 옥수수 낱알이 곁들여 나왔고 볼리비아의 구운 생선 요리에는 삶은 옥수수 알맹이가 식사용으로 나왔다.
칠레에서 독특한 음료를 하나 만났다. 무슨 곡물 같은 것이 가라앉아 있고 크고 동그란 고형 물질이 든 음료였다. 산티아고 시장의 카페에서도 팔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의 슈퍼마켓 음료 코너에도 있었다.
하나 사서 먹어보니 복숭아향이 났다. 둥근 물질의 정체는 복숭아였다. 음료에 든 작은 알갱이는 옥수수였다. '모테 콘 우에시요(Mote con Huesillo, 말린 복숭아가 든 옥수수)'란 음료였다. 통곶감이 든 수정과가 연상되었고 복숭아 통조림과 비슷한 맛이었다. '버블 밀크티 속의 타피오카'처럼 음료를 마시고 나서 옥수수를 씹어먹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쌀로 밥만 해 먹지는 않는다. 밥도, 떡도, 음료도 만들어 먹는다. 옥수수도 갈아서 토르티야나 아레파로, 또는 삶아서 통째로도 낱알로도 먹는다. 페루의 음료, 자색옥수수로 만든 치차모라다(Chicha Morada)만큼이나 칠레의 '모테 콘 우에시요'는 옥수수를 먹는 창의적인 방법이다.
모테 콘 우에시요는 칠레 사람들이 즐겨 먹는 전통 음료라고 한다.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트래킹 후 산장 저녁 식사에서 디저트로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먹게 되니 '반가운 맛'과 '아는 맛'까지 더해져 세 배로 맛있어졌다.
여행지에서의 한 끼 식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