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여행자는 세 번 여행한다고 한다. 여행 전에 여행을 준비하며 한 번, 여행 가서 여행지에서 한 번,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을 추억하며 한 번. 나는 지금 리장(丽江[Lìjiāng])을 세 번째 여행 중이다. 아니, 리장을 두 번 다녀왔으니 리장에 대해선 네 번째 여행인가?
옥룡설산(위롱쉐산)의 위치
리장에 처음 간 이후 5년 만인 2018년에 리장에 또 갔다. 원래 언스 협곡(恩施 峡谷)을 갔다가 짙은 안개로 관광을 포기하고 싱이(興义)를 거쳐 리장으로 간 것이었다. 두 번째 찾은 리장은 처음 갔을 때와 같은 시기인 겨울 비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리장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중국 내국인 관광객이 넘쳤고 고성은 화려함을 넘어 번잡하고 흥청거렸다.
여행자도 젠트리피케이션 당한다. 리장의 사람 파도를 피해 리장을 벗어나고 싶었고 외곽으로 눈을 돌렸다. 리장은 리장 고성으로 알려진 다얀(大研[dàyán])외에도 수허고진(束河古镇[shùhégǔzhèn]), 바이샤고진(白沙古镇[báishāgǔzhèn])을 품고 있다. 수허고진은 리장고성에서 북쪽으로 5km, 바이샤고진은 수허고진에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수허고진 ⓒ위트립
수허고진과 바이샤고진은 리장에서 자전거를 빌려 다녀오면 딱 좋을 거리였다. 아쉽게도 자전거 대신 이층 버스를 타고 수허고진에 갔다. 수허고진도 관광객이 제법 있었지만 리장에 비할 바 아니었고 차분한 매력이 있었다. 길가다가 마주치는 파란색의 전통 복장의 나시족 할머니들은, 인생의 무게까지 원샷에 담아낼 수 있는, 세상 둘도 없는 사진 모델이었다.
수허고진의 사람들 ⓒ위트립
리장에서 수허고진 가는 길은 옥룡설산((玉龍雪山위룽쉐산)을 향해 나 있었다. 가는 길 내내 옥룡설산의 은빛 봉우리의 위용을 마주 대하고 보니 마치 옥룡설산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 강렬한, 거부할 수 없는 위엄에 사로잡혀 계획에도 없던 옥룡설산 관광을 급조하고 말았다.
수허고진 가는 길, 옥룡설산이 나를 부르네. ⓒ위트립
대한민국 아줌마, 한다면 한다. 즉흥과 도발이 또 자유여행의 묘미가 아니던가. 옥룡설산에 오르기 위해 두 가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얼어 줄을까 봐, 하나는 숨 못 쉬어 죽을까 봐. '방한용 내의'와 '휴대용 산소'가 그것이었다. 리장 곳곳은 설을 앞두고 있어 가게마다 물건이 넘쳐났고 설빔을 사러 온 북새통 속에서 하의 내의를 샀다. 부드럽고 얇고 질도 좋은데 단돈 3,000원, 행운의 득템이었다. 유*** 고급 히트텍 못지않은 성능이라 지금까지 한겨울 여행 때마다 애장품이 되었다.
티베트인에게 옥룡설산은 숭배의 대상이고 종교적 영산이라는데, 유네스코 유산이자 전 세계 배낭여행자의 베이스캠프인 리장에서 불과 30km 떨어진 이곳을 중국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 대대적으로 개발해 관광지를 만들어 놓았다. 막장드라마는 욕하면서 보고 관광지는 환경 파괴한다고 욕하면서도 간다. 옥룡설산(5,596m)은 히말라야 자락의 준봉 중 가장 저위도에 위치한 산으로 만년설로 덮여있다. 관광은 해발 4,500m 부근에 조성된 빙천 공원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수하에 들르는 걸로 루트를 짰다.
홍태양 광장에서 미니버스 7번을 타고 가려고 했으나 차가 안 와서 같은 처지의 중국인 2명과 흑차(黑车 불법 영업 승용차)를 흥정해서 갔다. 톨게이트처럼 생긴 빙천 공원 매표소 부근에 오니 옆에 앉은 중국인 1명이 승용차 트렁크로 몸을 숨긴다. 입장료를 한 사람분을 아끼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입장료가 1인당 130위엔, 한화 2만 원이 넘으니 마음같아선 나도 따라 하고 싶었다. 어쨌든 넷이서 3명 입장료를 내고 매표소를 통과했다.
빙천 공원은 전동차를 20분 타고 간 후 케이블카를 타야 했다. 케이블카는 해발 3,356m에서 출발하는데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케이블카가 아닐까?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부터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고산증세였다. 안 그래도 산소가 부족한 고도인데 사람 빼곡한 실내 케이블카 대기 건물 안에서 인파에 떠밀려 천천히 한 발자국씩 앞으로 옮겨야 했다. 이러다가 죽는다면 내 사인은 ‘고산증의 산소부족’이 아니라 ‘사람들이 호흡으로 뿜어내는 이산화탄소 질식사’ 일지도 몰라. 어딜 가도 ‘너무 많은 중국인(헌뚜어런(很多人=너무많은사람))’은 나의 관광 쾌적도를 넘어 이제 내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라니...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준비해 간 산소를 기포수 헤아려가며 반모금씩 홀짝거렸다.
지옥과 천당, 케이블카 대기줄과 케이블카 ⓒ위트립
케이블카 대기줄에서 지루하게 기다린 끝에 케이블카에 탔다. 순간 무슨 천국행 케이블카인 줄. 산소가 결핍된, 사람 많은 지옥의 대기실을 벗어나 그 자체로도 천국인데, 눈앞에 펼쳐진 설산의 파노라마는 숭고함과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천국에 갔더니 선물까지 주더라.’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케이블카는 4,500m 지점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잔도를 따라 빙하 계곡을 감상하며 천천히 1시간쯤 걸어 4,680m 표지석에 발을 찍었다.
옥룡설산 빙천 공원. 케이블카에서 내려 산책로를 따라 1시간쯤 둘러본다. ⓒ위트립
옥룡설산 4,680m 표지석 ⓒ위트립
내려오는 길에 백수하(白水河[báishuǐhé]바이수이허=람월곡(蓝月谷[lányuègǔ]란위에구)에 들렀다. 백수하는 석회암의 카르스트 지형이 만든 층층 연못과 그 아래 호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구채구(九寨沟[Jiǔzhàigō])와 황룡(黄龙[Huánglóng])을 섞어 만든 ‘미니 구채구와 미니 황룡의 조합’이었다. 석회질 계단형 계곡은 황룡을 빼닮았고 호수의 물빛은 구채구를 연상시켰다.
백수하는 람월곡(란위에구)으로 더 많이 불리는 것 같았다. ⓒ위트립
백수하에서 바라본 옥룡설산 ⓒ위트립
만년설 고산과 이 세상 물빛 아닌 호수에, 카르스트의 기묘한 지형까지, 중국에 없는 자연경관을 찾는 게 더 빠를 듯하다. 오늘따라 온갖 지질 지형을 종류대로 다 품은 중국에 배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