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청두에서 출발해 구채구(九寨沟 지우자이고우)와 황룡(黄龙 황롱) 3박 4일을 관광할 예정이었다. 구채구보다 더 기대했던 황룡 여행은 좌절되었다. 구채구에서 황룡 가는 버스가 빙판길이라 운행이 끊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황룡 대신 쑹판(松潘 송번)을 들렀다가 청두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쑹판은 청두 가는 길목이니 동선에는 무리가 없었다.
구채구에서 출발한 지 2시간 만에 쑹판에 도착했다. 오전 9시 반,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청두행 시각표를 보았다. 청두행은 6시, 6시 반, 7시, 하루 세 번뿐이었고 버스는 이미 다 떠나버렸다. 결론은 오늘 쑹판에서 하룻밤 자야 한다는 것.
터미널을 나서니 누가 호객을 했다. 터미널 맞은편 숙소로 따라갔다. 먼저 방을 보여달라고 했다. 방을 휘리릭 둘러보는 1분 남짓만에 동물적 감각으로 숙소를 스캔했다. 창문이 있는지, 방은 깨끗한 지, 햇볕이 잘 드는지, 문 잠금장치가 튼튼한 지, 전기장판과 전기 주전자가 있는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욕실의 뜨거운 물 급수 확인과 변기 물 수압 테스트까지 마쳤다. 이 깨알 같은 기준을 다 통과한 객실은 가격도 착한 60元(한화 11,000원)이었다. '흐음, 숙소 복(福)은 있나 보다.'
방에서 와이파이가 잘 잡히지 않아 로비로 나와 가족들에게 밀린 소식을 보냈다. 호객꾼 아저씨는 숙소 주인이었고 로비 난로 앞에서 식사하며 내게도 국수를 권했다. 덕분에 맑은 탕에 감자만 넣고 끓인 가정식 국수를 얻어먹었다. 추운 날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니 속이 확 풀리면서 행복감이 밀려왔다. '혼자 여행'의 '혼자임'을 잠시 잊게 해 준 '소울 푸드'의 맛이었다.
숙소 주인의 인심으로 아점도 먹었겠다 뜨거운 국물로 속도 데웠겠다 여행 에너지 한껏 충전한 상태에서 쑹판 시내로 나갔다. 아침에 내리던 싸락눈은 해가 오르니 그쳤고 겨울치곤 포근한 날씨였다. 고성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 쑹판(松潘) 관광 ]
* 쑹저우 고성 입구(북문)-칭쩐 거리(清真街 무슬림 거리)와 칭쩐쓰(清真寺 무슬림 교당)-관음각(观音阁)-영월교(映月桥)-남문 성벽-고송교(古松桥)
* 북문~남문: 1km
쑹판(松潘)의 옛 지명은 쑹저우(松州 송주). 쑹저우란 지명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관광이 돈이 된다는 걸 쑹판 지자체가 알아차렸나 보다. 성벽을 보수하고 성 안의 주요 거리와 쇼핑 타운도 잘 다듬어 놓았다. 시내에 사람이 많았지만 거의 현지인들이었고 나 같은 관광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겨울만 아니면 말트레킹을 하러 많이 오는 곳인지 현지 여행사들도 많았다.
추운 지역이라 그런지 남자든 여자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감싼 패션 일색이었는데 이제까지 내가 봐왔던 중국인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이곳의 원주민인 짱족(藏族 장족) 티베트인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게 간판의 글자도 생경했다. 순간적으로 공간 이동을 해서 중국 안의 또 하나의 새로운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쑹판은 쓰촨성의 아바장족강족자치주(阿坝藏族羌族自治州)의 중심 마을이다. 7세기 티베트 전역을 통일한 토번국 왕인 송첸감포가 이곳 쑹판을 차지하고 당나라를 위협하게 되자 당 태종이 문성공주를 송첸감포에게 시집보내 화친을 맺은 장소가 두 나라의 접경 지역인 쑹판이었다고 한다. 쑹판 고성 초입의 랜드마크인 문성공주의 화친상이 당나라와 토번국의 교류의 역사를 상징하고 서 있었다.
쑹판은 원주민인 짱족(티베트족) 외에도, 무슬림인 후이족(회족), 창족(강족)이 많이 사는, 한족 입장에선 소수민족 마을이다. 길거리 곳곳엔 말린 야크 고기가 걸려있고 빨랫비누 덩어리처럼 생긴 야크 치즈를 내다 팔고 있었다. 머리에 흰 모자를 쓴 후이(回族 회족)들도 종종 보였고, 무슬림 거리엔 제법 규모가 큰 쇠고기와 양고기 시장과 무슬림 교당인 칭쩐사(清真寺)도 있었다.
티베트를 여행하려면 시짱(西藏 티베트)의 수도 라싸(拉萨)와 그 일대를 여행해야 하나 외국인은 개인 여행을 금지하고 있으므로 여행사 단체 소속으로 여행 허가서를 사전에 얻어 가야 한다. 티베트는 중국의 화약고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운동을 요구하는 티베트인들의 저항의 불씨가 늘 남아있기 때문이다. 티베트는, 타이밍이 안 좋으면, 그곳에 들어가 있던 외국인 여행자가 추방당하거나 티베트로의 외국인 여행 허가가 불시에 무기한으로 막히는 곳으로 여행자들 사이에 악명 높다.
그래서 쓰촨, 윈난, 깐수, 칭하이성 오지의 몇몇 티베트 자치구 마을들이 허가증 없이 자유롭게 관광할 수 있어 티베트 여행의 대체지로 떠오르고 있고 샤허(夏河)와 통런(同仁)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샤허와 통런도 길이 멀다.
일부러라도 알고 가야 할 곳을, 얼떨결에 얻어걸렸는데 그곳이 미니 티베트, 송판이라니! 이토록 만나기 어려운 티베트인들을, 이토록 들어가기 어려운 티베트 마을을, 구채구 구경 끝에 청두로 돌아가는 문턱에서 만난 건 '나의 타고난 여행운'이 아닌 그 무엇으로 설명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