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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Sep 12. 2021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 웬양의 다락논

내가 무슨 다락논 탐사가라도 되는가 싶다. 3년 전 필리핀에서도 바나우에의 다락논을 보러 마닐라에서 10시간 넘게 버스 타고 다녀오지 않나, 쿤밍에서도 하루 종일 버스를 달려야 하는 웬양(元阳[Yuányáng] 원양)까지 혼자서라도 가겠다고 나서다니. 그러나 웬양의 다락논 사진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마법에 끌린 듯 웬양을 향할 것이다. 일단 쿤밍에 온 이상. 나처럼 말이다.

     

웬양은 쿤밍에서 남쪽으로 약 300km 떨어져 있다. ⓒ위트립


대망의 웬양제전(元阳梯田[Yuányángtītián]) 가는 날. 쿤밍 남부터미널에서 첫차를 탔다. 출발시각만 잘 지키는 중국 시외버스는 오늘도 예정보다 많이 늦게 해 질 무렵에야 도착지에 데려다주었다. 종점인 웬양의 신지에(新街树[xīnjiē])에서 숙소가 있는 다락논 마을까지 더 이동해야 한다. 같은 버스에 탔던 서양 여행자들은 어느새 차를 구해 가버렸고 나 혼자 *빵차를 대절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빵차 기사 하나가 날 붙들고 늘어졌다. 숙소가 있는 뚜어이슈(多依树[duōyīshù])까지 100위안(한화19,000원)에 가자는 걸 70위안(한화13,000원)에 합의를 보고 탔다.(*미엔빠오처(面包车):미니버스, 봉고)

      

웬양제전 마을에 다와갈 무렵 ⓒ위트립 


'날 어두워지는 시골길을 기사랑 단둘이 타고 간다?' 기사가 도중에 뷰포인트라며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경계를 놓지 못하는 불안한 상황에서도 논 풍경은 아름다웠다. '나는 사진 찍고 기사는 담배 피고'를 몇 번더 반복한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서 어두워질 무렵 찍은 다락논 맛보기 사진 ⓒ위트립


숙소는 진짜 방만 팔았다. 현지 투어를 안내한다든가 다락논 관광을 같이할 숙박객들을 묶어준다든가 일체의 관광 서비스가 없었다. '내일 종일 관광도 또 빵차를 나 혼자 전세 내란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오늘 이용한 빵차를 다시 예약했다. 여행이 잘 안 풀리는 것 같아 낙심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숙소 옥상에 올라갔다가 옆방 여행자를 만났다. 광저우에서 온 중국 아저씨였고 부인과 딸, 셋이 어젯밤 늦게 올라왔다고 했다. 내가 가려는 라오후쮀이까지 걸어서 갈 계획이라고 하길래 나도 동행하기로 했다. 광저우 아저씨가 내 빵차 예약을 그 자리에서 취소해주었다. 여행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혼자 여행자'는 시도 때도 없이 일희일비, 아니 일비일희했다.

      

숙소에서 내려다본 다락논의 일출 ⓒ위트립


숙소에서 일몰 포인트로 인기 있는 라오후쮀이(老虎嘴[lǎohǔzuǐ])까지는 15km의 산길이다. 광저우 가족 셋과 일행이 되어 출발했다. 광저우 아저씨가 사전에 조사해온 것도 모자라 수시로 길을 물어 가며 앞장선다. 이런 믿음직한 가이드가 또 어디 있겠는가. 가는 도중에 일하러 가는 현지인들과 물담배 피우는 할아버지, 동네 꼬마들도 마주쳤다.

     

한무리의 동네 아이들, 그리고 현지인들 ⓒ위트립



출발한 지 세 시간 만에 마을 하나를 만났다. 광저우 아저씨가 민가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식당은 아니지만 점심을 줄 수 있다고 했단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픈데 현지인의 가정집 점심이라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리 이방인 여행자 일행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붙임성 좋은 이 집의 큰딸이었고 하니족이라고 했다.

     

동네 아이들이 안내해 따라간 신축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위트립


민가에 들어가는 순간 내가 세계테마기행 중국편 출연자가 된 줄 알았다. TV 속에서나 봤을 법한 장면이다. 하니족의 집은 말이 집이지 창고 수준이었다. 콘크리트로 외벽만 세워놓은 네모난 공간 안에 옷장, 침대, TV, 식탁, 주방용 싱크대가 제각기 놓인 게 다였다. 안주인이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난간에 서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락논을 일구며 사는 하니족 마을이었다.

       

집 외관, 마을 공동 화장실의 돼지들 ⓒ위트립
집 내부. 침대와 싱크대가 모두 한 공간에 있는 원룸식이다. ⓒ위트립


집 2층에서 바라본 하니족 마을 전경 ⓒ위트립


딸아이가 안내해 준 화장실은 집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마을 공동화장실이었다. 문 없고 칸막이 없는 중국 화장실에 이젠 놀라지도 않는데, 재래식 변기 아래에서 소리가 나서 놀랐다. 거기엔 분뇨로 키우는 일명 똥돼지들이 꿀꿀거리고 있었다.

     

소박한 점심상 ⓒ위트립


한참만에 먹을 것이 나왔다. 삶은 구황작물에 야채 국, 짠지, 돼지고기 요리였다. 점심상은 보기에도 맛도 초라했지만 식당도 없는 이곳에서 따뜻한 밥과 국물이 어딘가 싶어 밥 한 그릇을 비웠다. 광저우 아저씨가 네 사람 식사값을 주인아줌마에게 드리니 한사코 받지 않아 이 집 할아버지 주머니에 “술 사 드세요”라며 넣어 드렸다. 

    

얼마를 걸었을까? 마침내 일몰 뷰포인트 라오후쮀이에 도착했다. 장관이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입이 딱 벌어질 규모의 계단식 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높은 곳에서 수직 방향으로 내려다보니 다락논의 경사감은 덜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똑같지 않은 곡선이 층층이 현란한 패턴을 뽐내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프랑스 항공사진작가 얀(Yann)이 부럽지 않았다. 

     

일몰 뷰포인트 라오후쮀이의 다락논 ⓒ위트립


다락논 촬영을 위해 해지기를 기다리는 카메라들 ⓒ위트립


한 무리의 사진가들이 삼각대를 장착한 채 앵글을 맞춰놓고 있었다. 아직 해가 쨍한 시각이라 다들 '자리 잡고' 스탠바이 상태였다. 사진에 담기엔 아직 빛이 너무 많았다. 사진가도 그냥 관광객도 다들 기다렸다.

      

마침내 해가 내려와 산에 걸리기 시작하니 다락논에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덩달아 주변의 카메라들이 바빠지며 연신 셔터음이 터졌다. 보는 내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어메이징'하고 '언빌리버벌'한 광경이었다. 그냥도 멋진데 노을빛이 물 찬 논에 반사되며 순간순간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락논에서 '빛의 행위 예술 쇼'가 한바탕 벌어졌다. 

  

라오후쮀이 다락논의 일몰 ⓒ위트립

   

다락논의 일몰 ⓒ위트립


저렇게 높은 곳까지 저렇게 험한 곳까지 누가 언제부터 논을 일구었을까? 과연 인간의 노동과 그 노동에 들어간 시간은 위대했다. 이토록 장엄한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이라니. 저 한 자락 한 자락의 논은 조상 대대로 하니족 사람들의 밥이요,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웬양의 다락논을 본 이래 난 진짜 다락논 탐사가가 되었다. 때때로 우리나라의 다락논을 찾아다니며 그 아름다움과 그곳에 배어 있는 땀의 신성함에 감동하곤 한다.


통영 미륵산에서 바라본 야소골 다락논(좌), 경주 학동마을의 다락논(우) ⓒ위트립





[여행정보]

1) 다락논은 겨울에 물이 차 있을 때가 사진촬영 적기로 인기가 높음.

2) 쿤밍 남부터미널에서 웬양 가는 버스 이용. 버스는 웬양 신지에(新街树 xīnjiē) 터미널 하차,

   다락논은 여기서 다시 빵차를 이용해 산간 마을로 더 올라가야 한다.

   쿤밍에서 건수((建水, 지앤쉐이)를 거쳐 가는 방법도 있다. 건수까지 차편이 많아 편리하다.

3) 다락논 마을은 뚜어이슈(多依树), 빠다(坝达), 라오후쮀이(老虎嘴)가 있으므로 어디를 갈 지 미리 정해 놓아야 함. 

 *  나는 일출 포인트로유명한 뚜어이슈(多依树)에 숙소 정했고, 여기서 오후에 일몰 포인트 

    라오후쮀이(老虎嘴)로, 이동 관람할 계획으로 동선을 짬.

 * 일출포인트 부근에서 숙박하면 일출은 트래킹해서 보면 되고, 일몰 포인트 감상은 차 대절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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