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밍에서 석림을 다녀온 후 구이저우성(贵州)의 싱이(兴义흥의)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쿤밍에서 싱이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뤄핑(罗平[luópíng] 라평(나평))을 들를까 말까 계속 고민되었다. 1월 말인데 유채꽃이 폈을까?
중국은 1월부터 8월까지 유채꽃을 볼 수 있는 나라이다. 1월은 윈난과 같은 중국의 남단에서 8월은 하얼빈이나 만저우리같은 최북단에서. 그런 중국에서 단연 유채꽃 하나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윈난성 시골의 작은 마을이 있으니 바로 뤄핑이다.
뤄핑은 윈난의 쿤밍에서 동쪽으로 207km 떨어져있다
뤄핑은 유채꽃 성지이다. 서울시 면적에 달하는 곳(667제곱킬로미터)이 유채꽃으로 넘실댄다. 유채밭의 직선거리만 45km에 달해 차로 1시간을 달려도 계속 유채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세계 최대 유채밭 군락지이고 중국 전역을 넘어 해외의 사진가, 특히 한국 사진가들에게 인기 있는 핫플레이스이다. 한국에서 사진가들을 모아 떠나는 윈난의 여행지 리스트에 위안머우의 토림(元謨土林 원모토림), 동촨의 홍토지(东川 红土地 동천 홍토지), 웬양의 다락논(元阳梯田원양제전)과 함께 뤄핑의 유채밭이 빠지지 않는다. 웬양의 다락논에 물이 차 있을 때이면서 동시에 뤄핑에 유채꽃이 피는 시기인 2월경에 주로 사진 테마 여행으로 간다.
사진 여행은 아니지만 내게도 뤄핑은 유채꽃이 주인공이니 꽃 유무가 궁금했다. 정보력의 부족으로 개화 정도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뤄핑으로 갈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해야 했다. 여행은 선택이고 때론 도박이다. 결국 쿤밍에서 뤄핑 가는 버스를 끊었다. 어쩌면 ‘꽃을 보러 그곳에 갔으나 꽃은 그곳에 없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잭팟이 터진다면 거대한 유채의 바다로 보상받는다.
무작정 가기로 하고 보니 현실적 문제가 또 있었다. 뤄핑에 도착해 유채밭 찾아가는 방법을 몰랐다. 나 같은 배낭객은 잘 가지 않는지 정보가 거의 없었다. 내 뒤에 올 배낭여행자를 위해 사전 답사하는 심정으로 현지에 가서 부딪혀보기로 했다.
뤄핑 시외버스 터미널과 진지펑총의 안내판 ⓒ위트립
쿤밍에서 버스로 4시간쯤 가니 뤄핑에 도착한다. 뤄핑에 도착하기 직전에 버스 옆자리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마침 루오핑 사람이라 하고 아직 꽃이 덜 피었다고 했다. 유채밭 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진지펑(金鸡峰 금계봉)으로 가면 된다고 하면서 교통편을 알려 주었다. 운 좋게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 필요한 여행 정보를 즉석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혼자 여행에서는 장거리 버스 짝꿍을 잘 만나야 한다. 현지 밀착 정보 입수에 성공. 뤄핑 아가씨가 적어준 진지펑총 가는 법
진지펑은 유채밭 전망대였다. 뤄핑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아가씨가 적어준 대로 판치아오(板桥 판교)행 버스를 탔고 차장에게 진지펑에 내려달라고 부탁하니 15분쯤 달려 내려주었다. 진지펑에서 이정표를 따라 화해관경대로 가면 된다.
진지펑의 전망대에 오르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인구 많다고 소문난 나라의 세계 최대 기네스북 등재 유채밭이라는데 오늘 이 시각에 이 유채밭을 보러 온 이는 진정 이 지구 상에 나 혼자란 말인가.' 한낮이라 해가 쨍했고 미세먼지인지 날씨 탓인지 몰라도 시야가 뿌옇다. 유채도 필까 말까 때를 견주는 시점이라 꽃도 별로다. 사진은 건질게 별로 없겠다. 전망대는 그냥 동네 작은 언덕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동네가 다 내려다 보였다.
이곳 유채는 주변 3개의 마을에서 같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뤄핑 사람들에게 유채밭은 우리네 논이나 다름없다. 이곳 사람들에겐 유채 농사가 생업이니. 유채는 순은 나물로 먹고 꽃으로 양봉을 하고 유채 씨로 기름을 짠다. 기름 짜고 남은 유채 씨 깻묵은 동물사료나 비료로 다시 쓰인다고 한다. 유채꽃이 한창일 때는 관상용이 되어 관광객도 모은다. 유채꽃 생애 주기 저마다의 쓰임새가 인간에겐 고맙기 그지없다. 아낌없이 주는, 진짜 다 내어주는 꽃이다. 잠시 유채 예찬론자가 되어버렸다.
꽃은 아직 이르나 봉우리 병풍만으로도 눈이 행복하다. ⓒ위트립
'음, 여기가 모두 유채밭이란 거지.' 군데군데 꽃망울이 비치기 시작해 여기저기 노릇노릇하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보니 유채꽃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유채밭 뒤로 야트막하게 봉긋봉긋 솟은 봉우리들의 실루엣은 장관이다.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석회암 봉우리들을 배경으로 노란 유채가 아닌 연두 유채를 눈에 한가득 담았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하니 한두 주 사이에 완전히 개화하지 않을까? 그럼 2월 초에서 중순경이 만개 철이겠다.
이제 막 개화가 시작되고 있다 ⓒ위트립
노랗게 터지기 직전의 꽃망울들을 보며 활짝 펴서 장관일 때를 그려보았다. 눈앞은 물론 좌우 눈 닿는 곳은 온통 노란색 꽃으로 일렁일 터. 절정의 순간에 빛나는 노란 꽃물결은 보는 사람을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하겠지. 그러나 절정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 역시 오길 잘했다. 이참에 '나의 여행 수칙'도 하나 만들었다. 갈까 말까 망설일 땐 그냥 가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