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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 Sep 09. 2023

창발의 시대 The verge

경제혁명, 종교혁명, 르네상스,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 40년의 역사

1490년부터 1530년 40년간의 사건으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계기가 되었다니! 불과 500년 전인데, 우리는 뭘 하고 있었나 하고 통탄하려 다가 한 세대면 전혀 다른 세상이 되는 시대에 살다 보니-우리 딸과 나는 같은 장소에 있지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그럴 수도 있다고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 짧은 시기에 일어난 일들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짬뽕이 되어 지지고 볶고 하다가 하나의 현상이라고 정의할만하게 되었다는 것. 개인의 인생으로 보더라도 어떤 일이 갑자기 일어난다기보다 내가 가진 신념, 행동, 생활 방식에 의해 서서히 쌓이고 있다가 어느 순간 발현되어 그렇게 보이는 것일 게다. 그래서, 15세 소녀였지만 카스티야 공주였던 이사벨라가 히론과 결혼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고 신은 기도를 들어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내가 원하는 방향의 모습을 그리고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알듯 말 듯 애매한, 일상에서 흔히 쓰이지 않은 단어 인 '창발'을 인터넷에 찾아보니


1. 남이 모르거나 하지 아니한 것을 처음으로 또는 새롭게 밝혀내거나 이루는 일."떠오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21세기 들어 중요한 키워드로 각광받고 있다. 당초 자연과학에서 제안된 이 단어는 사회과학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심지어 현대에는 소위 "창발 경영", "창발적 광고", "창발적 플레이" 같이 여기저기에 인기리에 쓰이고 있는 단어이다(나무 위키).


2. 창발(創發)또는 떠오름 현상 하위 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이다. 또한 불시에 솟아나는 특성을 창발성(영어: emergent property) 또는 이머전스(영어: emergence)라고도 부른다(위키피디아).


3. very close to an extreme state(네이버사전)


명확히 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어떤 의미의 단어인지 느낌은 온다. 딱 하나 꼬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일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복잡하게 얽혀, 미래에 일어난 일들에 뭔가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을 창발이라 하면 되겠다.


현재 양분법으로 동양 서양을 나눈다 치면 서양이 동양보다 전반적으로 더 발전되고 더 잘 산다고 볼 수 있다. 불과 500년 전만 해도 낙후된 곳이었던 서양이 어떻게 더 잘살게 되었을까? 많은 지식인들 사이의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온 이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에 관해 단일적인 관점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1490년에서 1530년까지 40년 동안 모든 영역에서 발전과 충돌 그리고 연결이 일어나 거대한 창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 사람의 일생에도 미치지 못하는 40년이란 짧은 기간에 이어진 중요한 변화들에 힘입어 서유럽이 세계의 변방에서 초강대국으로 변모하는 미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강력하고 파괴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은 단일한 과정이나 변수가 아니라 복합된 여러 가지 요소였다. 탐사를 위한 항해, 국가의 팽창, 화약이 사용된 전쟁, 인쇄술의 확산, 무역과 금융의 확대, 그리고 그들의 누적된 결과-종교적 격변, 광범위한 폭력, 세계화를 향한 팽창-가 복잡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을 충돌하고 상호작용했다."


저자는 이렇게 세계를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들이, 일상사의 구조 속에 녹아들지 않는다면, 특정한 개인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창문 역할을 할 9명의 인물을 선택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탐험',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와 국가의 부상', '알두스 마누티우스와 인쇄술' 등 9명의 인물과 연결된 시대 현상과 사건을 통하여 창발의 시대의 주요 모습을 보여준다. 위대하든 평범하든 실제 사람들의 삶에 접목해 보면, 적어도 당시에는 반드시 유익한 변화는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설사 혁신과 진보를 위하여 어느 정도의 파괴가 필요함을 인정하더라도, 파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부 유럽을 변방의 전초 기지에서 세계 질서의 절대적 중심지로 바꿔 놓은 대분기 Great Divergence는 1527년 제국의 병사들이 약탈을 위하여 로마에 진입하면서, 미래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490년의 세계를 바라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지금의 미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1527년에는 대분기로 이어지는 길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멀리 있는 희미한 윤곽에 불과할지라도, 그러한 미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비 효과처럼 몇 백 년 뒤에 미칠 영향을 그 시대 병사들은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지금의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훗날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또 영향을 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역사는 이렇게 이뤄지고 형성된다.   


Deus enim et proficuum
신과 이익을 위하여



<본문에서>


불과 40년-눈 깜빡할 사이나 다름없는-동안에 유럽이 폭발했다. 로마가 약탈당하기 40년 전인 1490년경의 유럽은 후미진 곳이었다. 파리, 런던, 바르셀로나, 그리고 베네치아 모두 유럽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인상적인 도시였지만, 당시 인류 최고의 성지를 찾는 외계인 방문자가 있었다면 이스탄불이나 베이징으로의 여행을 훨씬 더 선호했을 것이다. 견해가 다른 방문자라면 테노치티틀란(아즈텍 왕국의 수도), 델리, 카이로, 또는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에 유럽은 유라시아의 변두리에 있는 전초기지로 떨어져 있었다. 유럽은 경제적, 정치적 변방이었고, 역동적으로 팽창하는 오스만 제국이나 중국의 안정된 명 왕조와 비교할 수 없는 낙오자였다. 제정신인 도박꾼이라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한 제국의 창시자로, 더 나아가 산업화의 본고장이 되고 수백 년 후에 세계의 경제를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주체로서, 유럽에 돈을 걸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유럽과 유럽의 직계 후손 미국은 이전에 다른 어떤 지역도 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경제적 관행

이러한 이질적 추세들-인쇄술의 확산과 용병 군대의 활용같이 다양한-을 결함한 것은 신용, 부채, 대출, 그리고 투자에 관한 특별한 사고방식이었다. 그 사고방식은 유럽인이 자본과 자산을 이용하는 방식을 지배했다. 우리는 이를 경제적 관행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관행'은 특정한 게임의 규칙에 관하여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공유되는 이해를 말한다. 더 범위를 넓혀서, 관행은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시스템의 규칙, 신념, 규범, 그리고 조직 너머로 확장된다. 관행은 사람들이 게임의 규칙을 따르도록 하고, 규칙을 영속화하며,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도록 규칙을 조정한다.


정확히 이 시점에 유럽에 있었던 것은 탐험, 국가의 팽창, 화약과 전쟁, 인쇄술 같이 다가오는 시대를 정의하는 중요한 과정과 그들이 결합한 결과를 발전시키기에 매우 적합한 경제적 관행의 집합이었다. 이 모두는 값비싸고 자본 집약적인 과정과 기술이었다. 초기 자금을 조달하는 데만 상당한 금액이 필요했고, 계속해서 유지하는 데는 더 많은 돈이 들었다.


이 시기에 그토록 중요했던 경제적 관행은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는 관행과 같지 않았다. 신용은 대체로 개인적이었고, 신용도의 객관적 또는 산술적 평가보다는, 평판에 훨씬 더 크게 의존했다.


돈을 지불하는 능력이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대변했다.


특별한 시기

이러한 발전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기존의 세계 질서를 뒤집기에 충분했는데, 그 모두가 매우 집중된 기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별개의 현상이 아니라 동일한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추진되고 서로를 강화하는 과정이었으며, 일련의 우발적이고 예기치 못한 사건- 출생과 사망의 우연성, 결정의 타이밍 등-과 충돌하여 전례 없는 세계적 반작용을 초래했다.

그 반작용은 전환의 시대, 유럽인의 삶과 사회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놀라운 변화의 시기였다. 우리는 그 시기를 임계 시점, 즉 다양한 변화가 집중되어 이어지는 사건들의 경로를 근본적으로 변경한 수십 년 동안의 특별한 시기라 부를 수 있다.



1장.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탐험


처음에는 대서양, 이어서 인도양으로의 탐험과 팽창은 이 시대를 정의한 다른 프로세스들과 깊이 얽혀 있었고, 그 모두가 이익에 굶주려 위험성 높은 탐사 항해 같은 투기적 투자에 기꺼이 돈을 쏟아부은 금융업자 들과 수렴했다. 1490년대에 이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인쇄술은 콜럼버스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세계관에 접근할 수 있게 했고, 그의 '발견'을 빠르게 전파했으며 '산탕겔이 원정 비용을 치르기 위한 면죄부를 무더기로 찍어낼 수 있게 했다. 대포는 포르투갈인의 인도양 식민지 벤처사업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콜럼버스에게도 대포가 있었다. 이탈리아, 플랑드르 또는 이베리아반도 출신 금융업자의 네트워크가 이 모든 값비싼 프로젝트의 비용을 치를 자본을 제공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군주들의 국가 건설 설계는 수입에 대한 갈증 및 열강 확대에 대한 굶주림과 함께 모든 것에 면허와 추진력을 제공했다. 자본, 투자, 신용에 대한 공통적 사고방식과 틀을 만들고 지원하는 관행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공유된 믿음이 금, 향신료, 그리고 노예를 가득 실은 범선의 돛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2장.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와 국가의 부상


점점 더 적은 수의 통치자가 점점 더 많은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의 영토는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더욱 복잡해졌다. 전쟁은 더 길고 파괴적으로 되었고 비용이 증가했다. 나폴리를 놓고 다툰 페르디난드와 샤를 8세 사이의 분쟁은 불과 한 세대 만에 이탈리아에서 저지대 국가까지, 피레네산맥에서 라인란트까지 뻗어 나간 대규모전쟁으로 바뀌었다. 유럽 전역에서 떠오르는 국가 중에는 이사벨라의 스페인이 으뜸이었다. 그녀의 탁월한 재능과 무자비함은 당에게 우뚝 솟은 정치적, 이념적, 재정적 기반을 설정했다. 개인적 역량과 성격이 자신의 왕국 안팎에서 구조적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그녀의 피는 다가오는 세기의 갈등, 승리, 그리고 재앙의 씨를 뿌렸다.


3장. 야코프 푸거와 은행업


새벽 네 시쯤 아코프 푸거가 사망했을 때 도시는 잠들어 있었다. 이어진 장례에 대한 세부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애도의 표시도 거의 없었다. 지시, 명령, 그리고 숫자를 기록한 야코프 푸거의 펜은 감상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친구와 사랑하는 가족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것은 야코프 푸거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것은 그가 쌓아온 인간관계가 아니었다. 그의 삶의 영향력은 다른 방식으로 느껴졌다. 아우크스부르크에 남긴 자선재단, 태어난 도시에 가져다준 부, 저택을 장식한 예술품, 그리고 조카이자 후계자로 선택된 안톤에게 물려준 두툼한 장부들. 야코프는 1511년부터 1525년에 사망할 때까지 회사의 자산을 거의 열 배로 늘렸다. 그의 부유한 상인의 막내아들로 삶을 시작하여 역사상 최고의 부자로 끝을 맺었다.


4장. 괴츠 폰 베를리힝엔과 군사혁명


베를리힝엔은 여전히 군사 혁명의 일부였다. 명예와 이익을 위한 전쟁이 어린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그의 직업이었고, 폭력이 그의 정체성의 근본적 요소였다. 그는 영주, 왕자, 그리고 황제들을 위하여 복무하는 계약에 따라 군대를 모집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의 가족, 친구, 그리고 경쟁자들 모두가 이러한 군사계약 사업에 참여했고, 그중에는 정말로 엄청난 규모의 사업도 있었다. 역사를 통하여 항상 그랬듯이 전쟁은 영웅적 전투보다는 행군, 습격, 소규모 교전이 되풀이되는 고역이었고, 베를리힝엔의 회고록은 그 모든 것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사실상, 유럽의 군사 시스템은 1500년경에 공통적인 방식으로 수렴했다. 거의 언제나 귀족인 지휘관이 고용주(왕자, 왕, 또는 황제)와 정해진 수의 병사를 모집하는 계약을 맺고, 주문을 이행하기 위하여 병사를 찾아 나섰다. 차이점은 모병 담당자와 고용주 관계의 특성과 고용주가 모병 담당자에게 선급금을 지급하는지의 여부뿐이었다 그 시스템은 크고, 정교하고, 계약에 기초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용병 시장에 의존했다. 전쟁은 상비군에 기반을 둔 국가의 공공사업이기보다, 대개 통치자가 기업가에게 하도급을 주는 형태의 민간사업이었다.


중기병이나 보병 또는 용병들은 왜 프룬츠베르크나 베를리힝엔과 계약을 맺으려 했을까? 그들에게 약속된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대문이다. 그것이 바로 문자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신용이었다.


현금은 완벽하게 적절한 보상이었다. 충성심은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전쟁은 그저 비즈니스일 뿐이었다.


5장. 알두스 마누티우스와 인쇄술


인쇄술은 단지 도서 출판의 혁명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지성주의에서 종교적 믿음까지 눈 깜빡할 사이에 모든 것을 바꾸면서, 커뮤니케이션의 대대적인 개편을 촉발했다. 실제로, 인쇄기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16세기의 거대한 변화-종교개혁의 격변에서 다가오는 과학혁명을 위한 세계적 탐사까지-중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었다.


구텐베르크에서 옌센까지, 거의 모든 초창기 인쇄업자는 장인이었다. 그에 반해서, 알두스는 자신을 학자이자 교육자로 여겼고, 그런 생각이 평생 변하지 않았다.


투자할 자금과 숙련된 노동력을 갖춘 베네치아는 특히 자본 집약적 사업에 우호적인 곳이었고, 그에 따라 인쇄업자들의 경쟁이 치열해졌다. 1473년에는 열두 곳의 인쇄소가 베네치아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출판물의 과잉, 특히 고정 독자층을 주도한 학자들의 사랑을 받은 고대 라틴 작가들의 작품이 자금력이 탄탄하고 숙련된 인쇄업자를 제외한 모든 인쇄소를 곤경에 빠뜨렸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독자가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인 호황과 불황이 베네치아 같은 도시의 초창기 인쇄업을 정의했다.


인쇄술은, 점점 늘어나는 활기차고 지식에 굶주린 일반 대중에게 고대의 고전과 새로운 언어의 기초 문법으로부터 에라스무스의 재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전파하는 진정한 변화의 주체였다. 인쇄술은 키케로나 설교집보다 더 단명하는 제품들이 추가되면서 뉴스와 선전물을 만들어냈다. 다가오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과학혁명도 대량 생산된 인쇄물의 가용성에 의존했다.

그뿐만 아나라 인쇄업이 유발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베네치아나 아우크스부르크 같은 거대한 상업 중심지가 아니라 동부 독일의 작고 외진 대학 도시에서 일어났다. 인쇄술이 대륙을 둘로 나누게 되는 거대한 종교적 격변의 핵심적 무기로 바뀐 곳은, 마르틴 루터라는 무명의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사가 살았던 비텐베르크였다.


6. 존 헤리티지와 일상의 자본주의


15세기 내내 전반적 경제가 심각한 불황을 겪는 동안에 줄어든 인구, 남아도는 토지, 그리고 영주의 영향력 약화하는 하층민의 새로운 현실은 시골의 소작농에게 실질적인 혜택으로 작용했다.


헤리티지는 이러한 상인 계층구조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상인 merchant'은 가난한 떠돌이 행상, 일반 소매업자, 특별한 업종의 전문가, 그리고 유난히 부유하고 다양화된 상인자본가를 포함하여 다양한 관행과 직업을 포괄하는 모호한 용어다. 꼭대기에는 양모의 스테이플, 고급 직물의 머서스, 향신료의 그로서 Grocers처럼 특정한 상품에 대한 공식적 특권과 독점권을 소유한 기업 조직이나 길드에 속한 도시의 대상인이 있었다.

이들 대상인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다각화된 분야의 사업가로서, 헤리티지는 고도로 상업화된 유럽의 기회와 함정 모두를 반영했다. 이윤에 대한 굶주림은 콜럼버스의 항해를 가능하게 한 제노바인, 알두스 마누티우스에게 투자한 베네치아인, 또는 괴츠 폰 베를리힝엔 같은 남부 독일의 군사기업가들 못지않게 그를 몰아붙였다. 헤리티지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고, 그의 단순한 이윤 및 시장 지향적 행동은 그런 것이 어떻게 유럽 경제의 근본을 이루었는지를 보여준다. 존 헤리티지 같은 사람들을 가능하게(그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게)한 사회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수반되는 과정에서 누가 고통을 받거나 혜택을 입을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해외 항해와 화약 전쟁에서 인쇄기까지 모든 것에 투자한 사회였다.  


7. 마르틴 루터, 인쇄술, 그리고 교회의 분열


이후 130년 동안 진정한 종교적 열정과 근시안적 정치권력 다툼의 혼합이 유럽의 분쟁을 주도하며 수십만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쇄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동적인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교회의 개혁에 대한 오래된 열망이 당시의 특이한 상황과 루터자신의 독특한 재능이 뒤섞인 불안정한 혼합물과 충돌했다. 열정적이고, 지성적이고, 이례적인 재능을 갖춘 의사소통자 마르틴 루터는 16세기 유럽이라는 화약통에 떨어진 성냥불이었다. 이어진 폭발은 대륙의 미래를 바꾸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작은 반항에 이어진 세계는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다른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금융과 신용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금융화된 광산업에 힘입은 미래 수도사의 교육, 푸거 회사의 대출과 국제적 금융이 주도하고 종교개혁을 촉발한 레오 교황, 알브레히트 주교, 그리고 테첼의 면죄부 논쟁, 그리고 복잡한 투기적 신용 거래의 산물이며 종교개혁에 힘을 실은 수백만 부의 텍스트를 생산한 인쇄기.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을 향하여 걸어갈 때 이미 그런 세계의 대표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그것이 다가오는 심연의 가장자리를 넘어설 때까지 더욱더 밀어붙였다.


8. 쉴레이만 대제와 오스만 제국


쉴레이만이 물려받은 오스만 제국은 기본적으로 정복과 영토의 확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였다. 찰스 틸리가 서유럽의 상황을 언급한,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는, 유명한 말은 유럽 못지않게 오스만 제국에도 해당되었다. 오히려 오스만 제국에는 더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었다. 정복의 과실인 약탈과 노예가 국가 기구의 운영과 미래의 전쟁을 위한 재원이 되었다.


끊임없이 무일푼 상태에 빠지는 기독교도 경쟁자들과 달리 막대한 세금, 공물, 그리고 약탈물이 국가의 금고로 흘러들어오는 쉴레이만은 일상적으로 재정 흑자를 누렸다.


오스만 제국에는 신성로마제국을 특정지은 유형의 탐욕스럽고 자유분방한 군사기업가도 없었고, 16세기 후반에 스페인 군주들의 방대한 야망에 자금을 댄 야코프 푸거와 제노바의 금융업자 같은 인물도 부족했다. 통의 바달을 긁는 서유럽 방식-전쟁을 벌이고 재정적 문제는 될 대로 되게 하라-의 궁극적 결과는 부채, 막대한 이자 지급, 그리고 파산이었지만 그러한 접근법은 미래를 위한 핵심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오스만 제국이 결국 채택하게 되는, 세수와 궁정고위관리의 단기적, 비효율적, 고금리 대출에 점점 더 의존하는 임시방편적 조치는 장기적으로 실행 가능한 방식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재정적 메커니즘에 힘입어,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더욱 값비싼 군사 기술에 투자하고, 집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더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오스만 제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9. 카를 5세와 보편적 통치


보편적 통치에 대한 카를의 모든 원대한 계획과 열망은 결국 무산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패자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오르막빙판을 타려고 시도하고 실패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통치자라도 카를이 직면하던 모든 도전에 대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선 기독교 유럽의 통합을 이루고, 독일과 그 너머의 종교개혁가들을 제압하거나 그들과 타협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사악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벌인 부하들을 감독하고, 이탈리아 문제와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프랑스 분쟁에 관한 장기적 합의에 도달했다.

그런 의미에서 카를 5세는 이 시기의 유럽 전체에 대하여, 할 수 있었던 일과 없었던 일을 구체화하는 상징적 대리인의 역할을 한다. 국가의 기반, 금융 시스템, 인쇄된 글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기술, 변혁적 군사 기술의 발전, 그리고 중요한 종교적 혁신. 세계는 말루쿠 제도에서 페루까지, 새로운 지평이 가득했다. 좋든 나쁘든, 그러나 항상 영향력 있는 방식으로 카를은 그 모두에 손을 댔다. 유럽의 최고급 사치품에 휩싸인 그의 손은 대부분 깨끗한 상태로 남았지만, 부하들의 손은 죄악과 피로 물들었다.


결론적으로, 이들 장부는 잉크가 아니라 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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