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지 않았어~
유학을 가는 이유와 시기는 개인 사정에 따라 여러 가지고 '여기 아니면 절대 안 돼'라는 곳은 없으니 넓은 세상 어디든 가면 된다.
하지만 절대로 늦게 유학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늦어도 중학교 3학년 때는 유학길에 올라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공부를 하는 게 가능해 보였다. 그러려면 적어도 중학교 2학년에는 결정을 내리고 유학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한 학기 전에는 입학 절차를 끝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입학을 위해서 필요한 서류도 많고 입학시험을 쳐서 성적이 되는 학생을 받는 곳도 있어서 준비하는 시간이 꽤 걸린다. 가서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영어 공부하면서 적응하다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면 3년 정도 뒤에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혹시나 생각했던 것과 다르거나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면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 시간도 필요하니 중 2가 마지노선이다.
그런데, 우리 딸은 그 시기를 한참이나 넘긴 중 3 초가을 즈음 유학을 가겠다고 했으니 모든 것이 불가능하고 무모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보내기로 하고도 잘 한 건지 확신이 없었고 가서 힘들어할 때마다 못 가게 말려야 했었나 후회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늦게 간 것 같고, 보내더라도 1년 늦춰서 자기 나이에 맞게 보낼걸 왜 빨리 보내서 더 힘들게 했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준비를 좀 더 하고 여유 있게 했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유학 생활이 힘들어서인지 한국에 올 때마다 무척 행복해했다. 한국에 온다는 기대감으로 오기 며칠 전부터는 기분이 좋아져 목소리가 무척 밝아진다. 한국에 오는 게 좋으냐고 물으니 우리나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단다. 그래서 나중에 꼭 한국에서 살 거라고 한다. 애국자 되겠는걸? 한국에만 있었으면 몰랐을 텐데 몸소 여러 가지를 경험해보니 한국의 좋은 점이 더 부각되어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럼 그것 말고도 다른 좋은 점이 있을 텐데?
고등학생 때 가서 좋은 점
1. 친구들이 있다.
한국에 오면 만날 친구들이 많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스케줄 잡는다고 바쁘다. 오히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우리 딸 핑계로 더 자주 보게 된단다. 각자 바쁘니까, 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미루게 되는데 우리 딸은 머나먼 영국에서 왔으니 일부러 시간을 내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더 자주 만난다. 친구가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만날 친구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같은 또래지만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도 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잘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2. 공부 스트레스가 덜하다.
대체적으로 한국 고등학생들에 비해 덜하다는 의미이다. 우리 딸은 중학교 졸업을 하고 바로 A level 2년 과정으로 들어가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를 2년만 다니는 셈이다. 유학을 가자마자 준비할 틈도 없이 바로 입시 모드로 돌입하게 되어(A level 1학년 때 성적으로 대학을 지원하게 되니 1학년이 입시생이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공부의 양이나 문제의 난이도는 훨씬 덜 하단다. 한국처럼 모든 아이들이 대학을 가려고 목숨을 걸지도 않고 절대 평가로 성적이 주어져 한국 아이들의 살인적인 입시 환경에 비해서는 스트레스가 덜 한 것 같다.
3. 정체성의 혼란이 없다.
한국말이 더 편하고 자기표현이 가능하며 비록 지금은 중학교 수준이지만 한국말 쓰기도 가능하다. 우리 딸은 나중에 한국에서 살 거라고 하니 나중에 좀 더 노력하면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어릴 때 유학 간 경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여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으며, 만약 한국에서 직장을 구해도 한국 말이 서툴고 특히 글 쓰는 걸 힘들어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중학교만 끝내고 가도 ‘난 누구 여긴 어디‘ 할 필요 없이 '한국인'이다.
4. 덜 싸운다.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살짝 넘어간 시기라 막무가내 트집이나 고집을 덜 피운다. 사춘기를 넘기고 자아가 형성되면 본인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뭘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필요한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되어 훨씬 수월하게 지낼 수 있다. 또 전화로 얘기할 수밖에 없으니 쓸데없는 요소들은 제거되어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덜 하는 것 같다. 티격태격하더라도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통화한다. 서로에 대한 애틋함(?)도 있으니 아무래도 짜증을 덜 내는 거겠지?
5. 애국심이 생긴다.
중학교 때까지 알던 대한민국은 너무 좋은 세상이었나 보다. 한국은 학교 선생님들도 너무 친절하고 친구들도 너무 잘 통하고 재미있고 급식도 맛있다. 학원도 있고 문제집도 많고 모르는 걸 물어보면 바로 답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널렸다. 편의점도 가깝고 맛있는 것도 많고 배달도 엄청 빠르다. 지하철도 깨끗하고 택시도 저렴하고 낮이나 밤이나 길거리를 다녀도 너무 안전하고 등등등.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라! 애국심 만빵이 된다.
그냥 유학 가서 좋은 점
1.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난생처음 엄마랑 떨어져 이역만리 먼 곳에서 꿋꿋이 잘 버티며 성실하고 열심히 잘해주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알아서 척척 해내는 걸 보니 너무 대견하다. 의외로 강한 아이라는 또 다른 모습을 알게 되고 발현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유학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고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히 잘 적응하고 있어서 감사하다. 엄마도 최선을 다해서 서포트를 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겠지?
2. 독립심이 커진다.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니 독립적이고 자립적이 된 것 같다. 한국에 와도 많은 일들을 혼자 처리한다. 끼니도 알아서 해결하고 가끔 설거지도 해놓고(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않은 일이다) 정리 정돈도 알아서 한다. 아직 엄마 손길이 필요한 나이인데 이렇게 커버렸나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언젠가는 부모의 손이 필요하지 않은 날이 올 텐데, 남들보다 그 시기를 조금 당긴 거라 생각한다.
3. 미니멀리즘이 된다.
기숙사가 좁아서 물건을 많이 놓을 공간이 없어 물건을 살 때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진짜 필요한 것이 아니면 안 사게 되고 짐이 많으면 나중에 처리하기도 힘들고 결국엔 버려야 하니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한국을 오갈 때도 진짜 필요한 물건만 챙기다 보니 초반에는 큰 가방 2개를 들고 왔다 갔다 했었는데 점점 줄어 이제는 큰 거 하나면 충분하다. 본의 아니게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있다.
4. 경제관념이 생긴다.
영국 물가가 워낙 살인적이다 보니 하나를 사더라도 여러 요소를 고려해 보고 구매하거나 구매하는 횟수가 많이 준 것 같다. 1~2주에 한 번씩 장을 볼 때도 Tesco, Sainsbury's, Waitrose 3군데 슈퍼마켓의 가격을 비교해 보고 싼 곳에서 구매를 한단다. 아껴 쓰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한국과 비교하면 물건 자체 가격이 너무 비싸니 자연스럽게 절약정신이 생긴 것 같다. 미리 경제관념을 가지고 돈을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대견하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호강시켜줘~
5. '집'의 소중함을 안다.
내가 돌아갈 집, 마음을 뉘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의 위안이 되는지 알게 된다. 언제든지 반겨주는 가족이 있고 본인의 손때가 묻은 물건이 놓여있는 자유롭고 편안한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좁은 기숙사에서 구속받는 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일인 듯싶다. 진짜 '홈 스위트 홈'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려있어 정당한 이유를 찾아보니 여러 가지가 나온다.
시기적절하게 잘 보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