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by 유이

20세기의 아들러 심리학을 살아 있는 일상의 언어로 해석하여 21세기 독자들의 삶에 적용하도록 한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베스트셀러이다. 프로이트식 '원인론'을 아들러식 '목적론'으로, 특히 트라우마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이론에 머리를 한대 맞은 듯 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트라우마로 정의해 버리고 나면, 쉽게 설득할 수도 있고 쉽게 설득당 할 수도 있어서 너무나 당연하게 남용되어 온것 같다.

트라우마는 지울수 없는 것인가? 계속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트라우마와 같은 프로이트식 원인론은 과거의 특정 한 사건만을 선택해 현재 자신의 복잡한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아주 '저렴한 시도'이며 오히려 어떻게 과거의 트라우마적 경험이 현재의 내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도록 놔둘 수 있냐고 얘기한다. 아들러 심리학을 기초로 던지는 저자의 주장은 명확하다(감수자의 말을 일부 인용).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한다.
미래의 꿈과 목적을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를 통해 친근하게 문제에 접근하고 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삐딱한 자세로 철학자에게 도전하는 청년의 모습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대변하고 있다. 내가 가진 의문을 청년이 대신 물어주고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차근차근 풀어주니 어렵게 생각되는 심리학이 우리의 일상에 녹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진다. 상식을 뒤집는 철학자의 기저에는 아들러의 이론이 바탕이 되어 있음을 인식하면서 다시한번 아들러에 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본문에서]


번뇌로 가득한 그의 눈에는, 세계는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데 행복이라니?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청년 그러면 다시 묻겠습니다. 세계는 아주 단순하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입니까?

철학자 그렇네. 세계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단순한 곳이고, 인생 역시 그러하다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달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일 테지.


철학자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물물의 온도는 1년 내내 18도를 유지한다네. 이것은 누가 측정하든지 간에 똑같은 객관적인 수치지. 하지만 여름에 마시는 우물물은 차갑게 느껴지고, 겨울에 마시는 우물물은 따뜻하게 느껴진다네. 온도계는 늘 18도를 유지하지만 여름과 겨울에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이지.

청년 요컨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착각하게 된다?

철학자 아니, 착각이 아닐세. 그때 '자네'가 우물물이 차갑다거나 따뜻하다고 느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네.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거지.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주관에 지배받고 있고, 자신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 지금 자네의 눈에는 세계가 복잡기괴한 혼돈처럼 비춰질 걸세. 하지만 자네가 변한다면 세계는 단순하게 바뀔 걸세. 문제는 세계가 어떠한가 가 아니라, 자네가 어떠한가 하는 점이라네.

청년 내가 어떠한가?

철학자 그렇지. 어쩌면 자네는 선글라스 너머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도 몰라. 그런 상태에서는 세계가 어둡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다면 세계가 어둡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선글라스를 벗으면 되네. 맨눈에 비치는 세계는 강렬하고 눈이 부셔서 절로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르네. 다시 선글라스를 찾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선글라스를 벗을 수 있을까?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용기'가 있을까? 그게 관건이지.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철학자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청년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철학자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네.

"인간은 과거의 원인에 영향을 받아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이것이 철학자의 주장이었다. 철학자가 제기한 '목적론'은 정통적인 심리학의 인과법칙을 근본부터 뒤집는 개념이었기에 청년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논박해 나가야 할까. 청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철학자 좀 전에 자네는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그런 성직이나 기질을 '생활양식(life style)'이라는 말로 설명하네. (중략) 그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 부여 방식'을 집약시킨 개념이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하게. 좁게는 성격에서부터 넓게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인생관까지 포함하는 말일세.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네.

철학자 생활양식을 바꾸려고 할 때, 우리는 큰 '용기'가 있어야 하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할 것이냐,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할 것이냐. 분명 자네는 후자를 택할 테지.

청년 ...... 방금 또 '용기'라고 하셨습니다.

철학자 그래.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일세.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한 거지.


철학자 자기 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걸세.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칫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지. 한편 자기 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걸세.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지. 더 쉽게 설명하자면, 60점짜리 자신에게 "이번에는 운이 나빴던 것뿐이야. 진정한 나는 100점짜리야"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 긍정이라네. 반면에 60점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면 어떠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 수용일세.


철학자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 수용이란 이런 거네.


"우월성 추구도 열등감도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성장을 하기 위한 자극이다"
열등감도 제대로만 발현하면 노력과 성장의 촉진제가 되는 거지.


청년 열등감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단 거군요?

철학자 그렇지. 인간은 내면에 자리한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전진하려고 하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더 행복해지려고 하네. 열등감이 이런 방향으로 나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데 한 발 내딛을 용기도 내지 못하고 '상황은 현실적인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차피 나 같은 건", "어차피 열심히 해봤자"라며 포기하는 사람들 말이야. (중략) 그건 열등감이 아니라 열등 콤플렉스야.


분노를 제어하는 것이 '참는다'는 것을 뜻하나?
그러지 말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배우게.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니까.

철학자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고 아울러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네. 경험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분노의 감정도 나오지 않을 걸세.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고 뒤로 미뤄서는 안 돼.
가장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상황,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라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며,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만 '개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개인으로서의 '자립'과 사회에서의 '협조'를 목표로 내걸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아들러는 여기서 "일', '교우', '사랑'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넘어서라고 말한다.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

철학자 자네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중략)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어. 자유롭게 살 수 없지.


청년 남이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싫어해도 상관없다고요?
철학자 그래.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은 내 과제야.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네. 물론 전에도 말했듯이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가는' 노력은 할 걸세. 하지만 거기서 물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 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질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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