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by 유이

몇 년 전 읽었던 책을 꺼내 다시 한번 읽는다.

언어에는 온도가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언어의 온도'라는 제목에서 나는 이미 따뜻함을 느낀다.

감정이 실리는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화상을 입힐 수도 있고 상대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할 수도 있다는 것에 공감하며 나의 언어 온도는 다른 사람에게 몇 도로 느껴졌을까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이제는 남에게 좋은 말을 하기보다 상처를 주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함에도 나의 언어의 온도는 종종 차가웠으리라…

가장 흔한 속담 중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다. 수도 없이 들어왔고 가끔 몸으로 체험하기도 하는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가장 쉽게 바꿔서 행할 수 있는 일인데, 그래서 이왕이면 좋은 말로 상냥하게 따뜻한 말을 건네면 될 것을,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 걸까?



섬세한 것은 대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예민합니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래, 탑이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아. 어디 탑만 그렇겠나.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한 법이지…”

틈은 중요하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다만 틈을 만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리고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본다.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 건 아닌지…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자식이 세상 풍파를 겪을수록 빗줄기는 굵어지고 축축한 옷은 납처럼 무거워진다. 그러는 사이 부모는 우산 밖으로 밀려난다. 조금씩 조금씩, 어쩔 수 없이.


청년의 증언처럼, 사람 성격은 아주 사소한 데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건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고 즉흥적으로 변조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네 일상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삼라만상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질은 다른 것과 잘 섞이지 않는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드러나곤 한다.


솔직히 말해, ‘솔직하기’ 참 어렵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남’을 속이면 기껏해야 벌을 받지만 ‘나’를 속이면 더 어둡고 무거운 형벌을 당하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형벌을….


“기주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채 아물지 않은 그리움운 가슴을 헤집고 돌아다니기 마련이다.

그러다 그리움의 활동 반경이 유독 커지는 날이면, 우린 한 줌 눈물을 닦아내며 일기장 같은 은밀한 공간에 문장을 적거나, 채 귀퉁이에 낙서를 끼적거린다. 그렇게라도 그리움을 쏟아내야 하기에. 그래야 견딜 수 있기에….


나는 어렵게 이야기하기보다 '사람''사랑''삶',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상당수 작가는 시간과 드잡이를 해가며 '머릿속 모니터'에 쓰고 지우기를 거듭한다. 단어를 고르고, 고치고, 꿰매는 일을 되풀이한다. 채 경험하지 않았거나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문장으로 이야기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덜어낼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적확한 문장을 쓰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지면에 스며들 때까지 펜을 들고 있어야 한다.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어쩌면 계절도, 감정도, 인연이란 것도 죄다 그러할 것이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이른 아침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 깊은 밤 방 안에 홀로 있을 때 느낀 상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들이켜며 중얼거린 말에서 가치 없는 표현을 걸러낸 다음 중요한 고갱이를 문장으로 옮기고, 다시 발효와 숙성을 거쳐 조심스레 종이 위에 활자로 펼쳐놓는 일이 글쓰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린 새로운 걸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무작정 부여잡기 위해 애쓸 때보다, '한때 곁에 머문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것을 되찾을 때 우린 더 큰 보람을 느끼고 더 오랜 기간 삶의 풍요를 만끽한다. 인생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한다.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고민을 해결하진 못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묽게 희석할 때, 꿈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꿈과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거나 지켜낼 때 우린 ‘어른’이 아닌 ‘나다운 사람’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울타리 저편에 남겨진 소중한 사람과 추억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나이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육백만 불의 사나이’‘소머즈’가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되고, 그 보급형 모델이 등장하지 않는 한.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과 세월만으로 나이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이를 좌우하는 뜨거운 용광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건강이나 신체적 상태가 가장 먼저 들어갈 테지만, 인간의 감정과 생각, 상상력, 그리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같은 요소들도 뒤섞이기 마련이다.


느끼는 일과 깨닫는 일을 모두 내려놓은 채 최대한 느리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삶의 밝음이 사라지고 암흑 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우리를 괴롭힌다. 그때 비로소 진짜 늙음이 시작된다.


“여보게, ‘부드러움’에는, ‘강함’에 없는 것이 있다네.
그건 다름 아닌 생명일세.
생명生과 가까운 게 부드러움이고 죽음死과 가까운 게 딱딱함일세.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부드러운 법이지.”


사람 보는 ‘눈’이란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과, 가능성이란 단어가 종종 믿음의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이는 숀이 들려주고 싶었던 유일한 문장인 동시에 윌이 듣고 싶어 한 유일한 문장이었다. 윌은 숀의 품에 안겨 펑펑 눈물을 쏟아낸다.

이런 멋진 대사를 선물한 로빈 윌리엄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던 날, 나는 몇 가지 인생의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우울한 사람의 마음을 가장 많이 위로한 사람도 우울증으로 세상을 등질 수도 있다는 것. 인생의 바다에선 누구나 한 번쯤 길을 잃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어쩌면 수많은 윌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것. 뭐, 어쩌면 우리 모두일 수도 있을 테고.


가끔 삶이 버겁거나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비겁함으로 둔갑하려는 순간마다 나는 숀 교수가 들려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곤 한다.

그러면서 하릴없이 되뇐다.

살면서 내가 용서해야 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인지 모른다고.

우린 늘,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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