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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 Oct 26. 2022

6.1.2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학생, 그럼 교사는?

  어떤 교사가 훌륭한 교사일까? 그건 답이 나와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학생들을 키우는 교사가 훌륭한 교사이다. 하지만 좋은 학생은 어떤  학생일까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을 길러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나는 초등학교 때 사람의 출세 방향을 세 가지로 배웠다. 돈, 명예, 권력이다. 권력을 갖고 다른 사람 위에 서든지 돈을 많이 벌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든지 속세적인 것을 초월한 무언가를 지키며 살아가든지 선택할 수 있었다.1 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는 돈만이 절대가치로 여겨진다. 문자 그대로 물질만능주의에서는 돈만 있다면 권력과 명예는 당연히 뒤따라오는 것이며 애초에 명예 따위를 돈과 같은 선상에 두지 않는다. 부모가 느낀 생존의 위협은 자연스럽게 자녀에게 전해졌으며 무엇보다도 부자가 되는 것은 자녀들의 인생 목표가 되었다. 혹자는 이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돈이 많은 건 좋은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생존에 대한 사회의 위협이 학생들이 돈이라는 물질 너머의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모두 상실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인 답변은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 행복에는 여러 전제 조건들이 필요하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생존의 안정이다. 그렇기에 생존을 책임질 만큼의 돈은 인간이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이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돈이 없으면 불행할 수 있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돈은 실제로는 가치중립적인 물건이다. 돈이 가치를 지니는 순간은 내가 무언가가 필요해서 그 돈을 쓰려는 순간뿐이다. 즉 만원짜리 포도를 손에 넣기 위한 조건으로써만 돈은 기능하며 돈 그 자체는 포도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가치중립적인 물질에만 인생의 가치를 부여한다면 결국 그 끝은 허무만이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라나고 있는 학생들에게 계속적으로 물질만능주의 사상만을 주입시키고 있다. 나의 ‘생존’을 위한 물질의 풍족만이 인생의 절대가치라고 주입시키고 있고 이를 무기로 아이들을 제어한다. 우리는 취업시장이 해가 갈수록 얼마나 좁아지는지 알고 있다. 대학의 간판이 만족할 만한 취업과 생존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사회는 변화하였으며 우리의 아이들은 그것을 느끼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직보다는 나를 우선해야 하며 인생의 행복을 위해 추구해야 할 것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가치들은 사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남에게 손해를 보지 않고 살기 위해 ‘착하게 사는 것’에 대한 바보같음을 배우고 양보와 배려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한 내 생존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입받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삶의 태도는 모든 판단 기준을 ‘나’에게 두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떠한 조직에 속해있는 조직원으로서의 ‘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의 권리와 내가 속한 사회조직의 요구가 상충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일정한 타협의 과정을 거쳐 사회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나의 생존만을 배운 우리 학생들은 이러한 타협의 과정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며 오직 나만의 가치를 존중하며 그 이상의 것을 보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성향은 균형점을 찾지 못할 때 자칫 이기주의적인 행태로 표출될 수밖에 없으며 당사자는 이를 인지조차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개인주의라는 말을 입에 담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개인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의 모순을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2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교사들은 교육에서 어떠한 방향성을 띄어야 할까? 시대에 순응하여 경쟁과 생존을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케케묵은 교과서적 질서만을 가르쳐야 할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이미 우리들은 알고 있다. 바로 균형이다. 경쟁과 생존, 도덕은 결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얼마든지 함께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기에 학생들에게 인성 교육을 실시하며 동시에 입시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 하에서 개인주의만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매긴다. 이에 그들은 입시에 학교생활의 모든 가치를 부여하며 다른 것들은 후순위로 미루거나 혹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금 케케묵은 것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물질만능주의의 세상이기에 정의와 도덕 등 형이상학적인 것의 가치는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에 역사의 소중함이 강조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조차 용서하게 만들어주는 가족애처럼 말이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케케묵은 고리타분한 개념들을 지금의 학생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공하고 바꿔야 한다. 영화 ‘킹스맨’에서 중년 아저씨인 콜린 퍼스에 전세계인이 열광했던 것은 클래식함의 가치를 트렌디함으로 성공적으로 변환했기 때문이다. 클래식하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무작정 도덕과 정의를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니라 도덕과 정의가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한 가치가 있음을 그들이 수용가능한 언어와 트렌디함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펜을 들게 된 이유는 나의 어린시절과 지금의 학생들을 비교해 보며 미안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가난은 결코 나에게 희망을 뺏어가지 않았었다. 가난은 불편하긴 했지만 내가 가진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았었다. 어려웠지만 여유가 있었고 꿈을 꿀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나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문화수준을 향유하지만 내가 가졌던 희망과 여유는 오히려 사라진 느낌이다. 하지만 그 시절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현시대가 그때보다 훨씬 더 발전한 사회이다. 다만 이러한 시대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불행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 글을 남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지금 우리 교육계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가끔은 내가 사상누각이 위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답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교육 본연의 목표가 아닌 변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교육의 목표를 외부에서 가져오는 형태가 정착된 것이라 생각한다. 교육이 학문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전문직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당시 교육자가 대표적인 명예직 중 하나였다 돈은 없지만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교육에 헌신하는 명예를 가지고 살아가는 직업말이다 정말 격세지감이다.

2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회 집단에서 다른 자아를 가진 개체이기에 벌어지는 충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이득을 보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손해를 철저하게 막으려고 하는 순간 인간관계의 단절이 올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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