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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Mayfeng Jan 12. 2018

쉼라의 하늘 밑

쥴리 메이펑의 사진이 된 순간들 #021

INDIA. Shimla. Sous le ciel de Shimla. ⓒ Julie Mayfeng





인도 쉼라. 2009.



한 사람이 난간에 기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사실 이 사진에는 그렇다할 비하인드 스토리는 없다. 계단 위쪽에서 시간을 보내다 아래로 내려왔고, 무심코 위를 올려다 보았다가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눌렀을 뿐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의 외장하드 속에 고이 넣어 두고 몇 개월을 지냈다.


초고(草稿)의 눈과 퇴고(推敲)의 눈이 다르듯이 사진을 찍는 눈과 고르는 눈도 서로 다르다. 찍고 고르는 그 사이에는 시간이든 공간이든 간격이 필요하다. 나는 내 사진들이 낯설어질 때까지, 일부러 내버려 둔다. 숲 안에서는 숲을 볼 수 없으니까. 나를 뒤흔든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과 여러 불순물들이 잠잠히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여행의 미열들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사진을 고를만한 눈이 생긴다.


어느날 나는 이 사진을 발견하고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내게 이 장면은 시(詩)로 읽혔다.  


얼마 전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을 읽다가 백석의 시(詩) '흰 바람 벽이 있어'와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어린 눈으로 읽을 때는 그저 구름 같았던 시(詩)가, 이제는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뜨겁고 절절한 것이 내 신경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저 사진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의 결이 고스란히 그의 시(詩) 안에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구체적이고 명료할 수 있을까?


다시 고개를 들고 사진을 본다. 세상의 모든 백석이 느껴진다.








흰 바람 벽이 있어

백석 (1912~1996)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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