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젊은 시절 자기주장이 강했던 부류였다. 20대에 사회과학 서적에 심취했을 때 세상은 옮음과 그름이 분명해 보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부로 이어지던 시기니 그렇게 판단할 요소가 많았다. 왜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두고도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자기 말과 행동이 진실과 가깝다고 믿을만한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옳다는 생각이나 신념에 기반하듯 타인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역사와 문명을 이어가며 법과 규범, 도덕률 등을 통해 규칙을 세워왔다.
그 규칙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다수가 그 시대에 맞게 잠정으로 합의했을 뿐이다. 일종의 잠정적 선이다. 선사시대나 이후에도 식인(食人)이 용인되던 지역도 있었다. 인간은 인지가 발달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그것은 나쁜 일이다’라고 규정했다. 선악(善惡)과 미추(美醜)와 고저(高低), 장단(長短)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이어령 선생은 생전에 ‘오늘도 내일도 절대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가장 경계하라’고 얘기했다.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의 일인데 ‘Yes’와 ‘No’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경고했다. 참 옳으신 말씀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며, 고정불변하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순도 100%의 흑과 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념으로만 가능하다.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누구나 회색지대에 살고 있다.
나는 사회과학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연과학에서는 실체적 진실이 분명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었다. 하나 그 또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내놓는다고 한다. 예컨대 전자는 관찰자의 유무에 따라 입자가 되기도 하고 파동이 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분명해 보이는 물질세계조차 확률적 분포만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중립은 없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이 쉽게 통용되는 곳이 정치 영역이다. SNS가 발달하면서 확증편향은 강고해진다. 내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그르다. 진영의 프레임은 바위처럼 단단하다.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 언쟁을 벌이는 경우도 생긴다. 진영의 양극에 서 있다가 보면 중간 지대(회색지대)는 비판의 대상이기 마련이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쿠라일 뿐이다. 정치는 정치에 머물러야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종교가 됐다. 정당의 당수가 교주가 되고 이를 떠받드는 사도들이 즐비하다. 이들은 상식에 반하는 어떤 행위도 내편이면 용인하지만 상대측은 배척한다. 정의와 진리는 그들의 몫이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해지기를 바란다. 서로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설령 강한 믿음이 있더라도 그것을 비폭력 방식으로 타인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후손이 살아갈 수 있는 미래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