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하는 자세

by 풍뎅이

요즘 들어 부고가 자주 날아든다. 친구나 지인의 부모님 부고가 많다. 어느 죽음이나 슬프지 않은 것은 없지만 친구나 동년배의 이른 죽음을 접했을 때는 죽음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20여 년 전 30대 젊은 나이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가까운 친구의 죽음으로 두어 달 동안 우울증 비슷한 후유증을 앓았던 기억이 있다. 수년 전에도 몇몇 친구들의 죽음을 겪었다. 이제 세월도 더 많이 흘렀으니 죽음이 언제 다가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죽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할 때가 많다.

죽음은 누구나 생각하기도 싫고 꺼려지는 주제다. 하지만 좋든 싫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치닫게 된다. 사람은 언제가 모두 죽기 마련이며, 이 자명한 진리는 우리를 두려움에 빠트린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 '내가 죽으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이성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죽음을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존재한 시간은 우주의 긴 시간에 비춰보면 말 그대로 찰나 같은 순간이다. 138억 년에 달하는 우주의 긴 시간 속에 나는 60년도 채 안 되는 세월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기 이전의 긴 세월을 무(無)로 지냈지만 이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마찬가지 내가 죽은 뒤의 기나긴 무(無)에 대한 시간 역시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아 있는 동안은 죽지 않은 것이며, 죽음은 내 죽음을 두려워할 모든 의식을 앗아간다. 순간과 순간이 교차되는 것의 이점이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죽음을 극복하는 데 또 다른 장애물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헤어지는 괴로움, 즉 애별리고(愛別離苦)다. 인간으로서 삶을 공유했던 가족과 친구 등과의 기억이나 추억이 죽음으로 향하는 나를 괴롭힌다. 그러나 이 또한 한 차례 지나가는 소나기 같다. 무대에 함께 섰던 배우들이 연극이 끝나고 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억은 기억으로, 추억은 추억으로 남을 뿐이니 죽음의 그 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모든 것이 정리된다. 죽은 자는 기억할 수 없으니 별 문제가 없고, 살아남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추억과 기억을 갖고 있지만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점차 잊히기 마련이다.


고통을 안고 죽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가장 현실적으로 염려하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병마와 싸우다 보면 삶이 피폐해지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위협받기 쉽다. 이제 이런 문제는 국가 등 사회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우리 사회는 급격히 고령화되고 있어 '고통을 수반한 죽음'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탄생을 선택할 권리는 없지만, 삶을 마무리하는 죽음은, 적어도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상황에서는 최소한의 고귀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마치 수면 내시경 검사를 받듯 죽음을 그렇게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두려움을 줄이고 죽음 이전에 남은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은 파티를 열어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평온하게 잠자듯 마지막 긴 호흡을 뱉을 수 있다면 죽음은 결코 두려워할 존재가 아닌 것이다.


종교적 방식은 훨씬 간결하다. 내세가 있고 천국이 있다고 믿으니 죽음은 천국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이성적 접근이든 종교적 방식이든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 어차피 우리는 옳든 그르든 인식을 통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