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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Aug 02. 2017

출혈

2017년 8월 2일, 여든아홉 번째

피가 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시뻘건 색이 무섭기도 하거니와 피는 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풍선에 담긴 물이 스멀스멀 새어나가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것은 더 이상 물풍선이 아니게 된다. 사람도 어찌 보면 물풍선 같은 것이어서 사람에게 피가 어느 정도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러니까, 피가 나는 일은 죽어가는 일과 같다.

나는 코피를 자주 흘린다. 갑자기 건조한 공기를 들이쉬거나 급격히 머리에 피가 몰리면 어김없이 코피를 쏟는다. 코피는 체온과 온도가 같아서 잘 느껴지지도 않는다. 인중까지 흘리다가, 맞은 편에 있던 사람이, 어, 피! 라고 하는 찰나에 알게 된다. 또 코피가 났구나. 내 피를 본 사람은 코피에서 죽음이라도 보았는지 나보다 더 극성이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무심히 지혈을 하고 피를 닦아낸다. 익숙한 듯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긋이 상처를 압박한다. 내가 놀라면 그들은 무너진다. 제발 빨리 멈추어라. 아마도, 그래서, 피가 나는 일은 무서운 일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주로 아침에 세수를 하다가 코피를 흘리는데, 고인 물에 똑 똑 떨어지는 핏방울은 신비로운 기운을 뿜으며 물 틈새로 흩어진다. 식용색소를 물에 떨어뜨리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다. 내 생명이, 무심한 물 속에 흩어지는 기분이니까. 내 피를 머금은 물은 분명 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내 일부가 세상에 흩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뿌연 피를 보면서 나는 물,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물 속에 흩어진 피를 보는 경험을, 또 다시 했다. 코피를 흘린 것은 아니고, 조금 더 심각한 사건이었다. 아끼는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족이 죽는 일은 피를 흘리는 일과 같다. 남겨진 이는 목으로 피를 토하고 눈에서 피를 흘린다. 그렇게 피를 떨어뜨리다 보면 핏기가 사라지고 입술은 퍼렇게 식는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울다가, 울다가, 다시 운다. 나는 장례에서 발인까지 자리를 지켰다. 숨도 쉬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그의 죽음에 내가 눈물을 흘릴 자격이나 있겠냐마는, 눈에서 흐르는 것이 멈추지 않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피는 누르면 멈추기라도 하겠지만, 눈물은 마음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와 멈출 수도 없었다.

그러나 친구는 울지 않았다. 이제 가장이 되었는데, 내가 무너지면 어머니와 동생은 누가 지키겠냐고, 나는 이제 눈물을 흘리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친구가 말했다. 그에게 숨과 피를 준 사람이 흙으로 흩어진다. 물 속에 흩어지는 피를 보는 일보다 더욱 처절하게, 그는 한없이 작아지고 있을 터였다. 가족을 끔찍하게도 아끼던 그였다. 마음 속에서, 그는 이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의연하게 지혈해냈다. 목에서, 눈에서, 가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온 몸으로 막으면서, 그는 울지 않았다. 그의 육체를 나눈 사람이 흙으로, 재로 흩어질 때까지, 그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는 그를 보면서, 그 누구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그 안에 계셨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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